일상의재구성

구직 필요성 못 느끼는 "유사 실업자"도 많다

Super:H 2008. 1. 23. 18:46
<출처: 동아일보>



《2001년 명문 사립대학을 졸업한 양모(33) 씨의 하루 일과는 낮 12시쯤 시작한다. 평소 새벽녘 동틀 무렵까지 롤플레잉 컴퓨터 게임과 만화책에 빠져 지낸다. 직장을 안 다녀본 것은 아니다. 졸업과 동시에 알아주는 대기업에 취직했지만 2년 만에 그만뒀다. 퇴직 후 간간이 입사 제의가 오는데도 양 씨는 번번이 거절했다. 청년 실업이 심각한 요즘, 주변에선 이런 그를 잘 이해하지 못 한다. 양 씨는 “아직 경제적 여유가 있고 억대 연봉을 받는 것도 아닌데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속에서 굳이 일할 필요를 못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 이처럼 일을 할 수 있으면서도 직장,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집안일도 하지 않는 인구가 200만 명이 넘는다. 통계청의 ‘2007년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비경제활동인구는 모두 1495만4000명. 이 중 순수한 무직자가 207만7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은 구직활동을 하는 실업자도 아니고 육아나 가사 일을 하는 가정주부, 또는 학교나 학원을 다니는 학생도 아니다. 주당 몇 시간씩이나마 아르바이트를 찾아 일하는 이른바 프리터족도 아니다. 나이가 들어 일을 못 하는 노인, 병에 걸려 쉬고 있는 사람도 이 분류에서 제외된다. 지난해 공식 실업률은 3.2%(78만 명)였다.

○ 일할 능력 있지만 구직의사 없어

독신녀인 고모(45) 씨는 10여 년간 해 오던 개인사업을 지난해 초 접었다. 그도 현재 별다른 계획이 없다. 고 씨는 “다른 사업을 벌이자니 돈이 부족하고 이 나이에 새로 취직을 하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최근 제빵 기술이라도 배워 볼까 하고 강습 학원을 다녀봤지만 이내 포기했다. 조금 더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유사 실업자의 공통점은 ‘굳이 일을 하자면 할 수 있는데도 안 한다는 것’이다. 보수나 사회적 지위, 복리후생 수준이 낮은 직장에 다니느니 그냥 쉬는 게 낫다고 판단한 사람, 다른 소득이나 가족의 지원이 있어 일을 안 하는 사람 등이다. 부모에게 기대 취업을 하지 않는 ‘캥거루족’도 있지만 조기 퇴직 후 더는 일할 의욕을 상실한 채 쉬는 중장년층도 많다. 통계청 관계자는 “이들은 모든 연령대에 걸쳐 고르게 분포돼 있다”고 말했다.

비록 이들은 지금은 근로 의욕이 없지만 아주 매력적인 직장이 생기면 언제든지 다시 취업할 생각을 갖고 있다. 다만 그런 직장이 생길 때까지 취직을 기약 없이 미루고 있는 것이다.

○ 노동시장 수급 불일치가 원인

유사실업이 장기화하면 세상사에 의욕을 잃고 이른바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 되기 쉽다. 직장도 학교도 다니지 않으면서 적극적인 직업훈련도 받지 않는 니트족은 국가의 경제성장률을 떨어뜨리고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일으킨다. 일에서 인생의 의미를 못 찾고 무기력하게 사는 사람이 늘어나는 사회는 건강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노동시장의 수급 불일치’를 꼽는다. 기업의 고용 창출력은 줄어들고 있는 반면 대졸 이상 고학력자는 꾸준히 증가하면서 구직자의 눈높이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유휴 인력 때문에 한국의 (인구대비) 고용률은 지난해 59.8%로 수년째 60%를 밑돌고 있다. 65∼70%인 선진국에 비해 낮은 수치다.

유경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구직자는 눈높이가 너무 높고 기업은 원하는 인재를 찾지 못하다 보니 구직난과 구인난이 함께 벌어지고 있다”며 “고용률을 올리려면 대학 교육과 기업의 인재상이 괴리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고용정책이 실업인구 감소뿐 아니라 비경제활동인구를 경제활동인구로 전환하는 쪽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실업률, 현실 반영 한계… ‘체감 실업률’ 개발중▼

정부도 현재의 실업률 통계가 실제 고용 현실을 나타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보고 각종 유사 실업자들을 반영한 ‘체감 실업률’ 지표를 개발 중이다.

통계청의 관계자는 22일 “전문가들과 함께 체감 실업률 통계를 만들기 위해 작업하고 있다”라며 “지표가 개발되면 앞으로 기존의 실업률 통계와 함께 매달 발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현재 국내 노동시장에는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비경제활동인구가 너무 많다는 지적이 있다”며 “이처럼 쉬고 있는 인구들을 활용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정책 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계량적인 지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어디까지를 유사 실업자로 분류할지 등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실업자는 구직활동을 했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을 뜻하기 때문에 일할 의사가 없거나 아예 취직을 포기한 사람들은 정부의 실업률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현재의 실업률 지표는 한국의 고용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한국의 실업률은 3.1%였다. 그러나 민간 연구기관들은 30세 미만 청년층의 경우 사실상의 실업자들을 포함하면 체감 실업률이 최대 20%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