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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독박 임신'을 끝내기 위한 절반의 성과: 헌법재판소 2019. 4. 11. 선고 2017헌바127 결정에 부쳐

Super:H 2019. 4. 11. 22:00

헌법재판소가 2019. 4. 11. 선고 2017헌바127 결정에서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제269조 제1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동 조항을 2020. 12. 31.을 시한으로 개선입법이 있기 전까지 잠정적용한다고 명하였다(헌법불합치 4: 단순위헌 3: 합헌 2). 이번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크게 두 가지 의의가 있으나, 다소 불명확한 이유로 단순위헌 선언이 아닌 헌법불합치 선언을 함으로써 두 가지 아쉬움도 남겼다.

1. 첫 번째 의의: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관계 재정립

이번 결정 법정의견(헌법불합치 의견)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의 대립관계에 있지 않음을 명확히 했다. 이는 임신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를 적확하게 포착한 것이다. 인공임신중절을 결정하는 여성이 반드시 태아의 생명권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공임신중절은 법정의견이 인용하는 바와 같이 여성이 태아의 사회적 생존을 담보하기 어려울 때 ‘태아를 위한’ 차악으로서 이루어진다.

태아는 여성의 존재를 그 생존과 성장의 사회적 필요조건으로 한다. 현대 의학기술이 발달하여 임신 22주 이후에는 모체 밖에 나온 태아의 자가생존 가능성이 높다고는 하나, 그 또한 현대 의학기술이 바로 ‘모체의 존재’에 상응하는 환경을 만들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숙아 또는 조산아가 생모의 손길 없이 인큐베이터에서만 지내면서 생존할 확률은 크게 떨어진다. 그러므로 태아의 생명권을 보장하려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태아의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충분히 보장하여 태아가 생존과 성장의 사회적 필요조건을 충분히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맞는다.

2. 두 번째 의의: 생명권의 제한적 절대성을 고려한 삼분기 이론(trisemester theory)의 불채택

이 맥락에서 보면 태아의 생명권은 적어도 여성의 자기결정권과의 규범조화를 위해서는 조정될 수 있는, 즉 ‘제한적 절대성’을 가지는 권리로 보아야 한다. 물론 생명권은 기본권 중 가장 소중한 최상위 기본권으로서 절대적 권리이지만, 그것이 곧 절대적으로 제한불가능한 권리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양심의 자유는 절대적 권리의 대표적인 예이지만, 양심에 따른 대체복무자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복무환경을 감수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다른 규범과의 이익형량을 위해서 종종 일정 부분 제한을 받는다. 사실 생명권 또한 사형제가 명문규정에 남아있는 우리 형사법체계에서 볼 수 있듯 형사정책적 필요에 의해 제한될 수 있는 권리이며, 나아가 사형제 폐지론 입장에서도 생명권의 제한적 절대성은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즉, ’생명권도 제한할 수는 있지만 죄질이 중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국가가 일방적으로 사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과잉금지원칙 위반이어서 위헌이다’라는 논리 구성이 가능한 것이다.

위와 같은 생명권의 ‘제한적 절대성’과 삼분기 이론(trisemester theory)은 양립불가능하다. 삼분기 이론은 낙태죄에 관한 법적 논의의 고전인 미국 연방대법원 Roe v. Wade 판결(1973년)에 등장하는 법리로, 임신기간을 셋으로 나누어 제1삼분기(임신 12주 이전)에는 자유로운 낙태가 가능하고, 제2삼분기(임신 13주-25주)에는 낙태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며, 제3삼분기(임신 26주 이후)에는 낙태가 절대적으로 금지된다는 이론이다. 낙태죄 가능여부가 임신주차에 따라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삼분기 이론은 태아의 생명권이 ‘어느 순간부터는’ 절대적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 순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를 구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위에서 살펴보았듯 태아의 생명권은 태아와 모체 간 관계의 본질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모체의 자기결정권과 대립관계에 있다고 볼 수 없고 그에 따라 적어도 모체의 자기결정권과의 관계에서는 일부 조정될 수 있는 성격을 지닌다. 이와 다른 전제에 서 있는 삼분기 이론은 더 이상 유효한 이론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결정의 법정의견이 삼분기 이론을 묵시적으로 부정하고 임신시기에 따른 기계적 낙태허용여부 결정 방식 대신 “임신 22주 이전이면서 산모에게 합리적 사정이 인정되는 경우라면 낙태를 형사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낙태허용조건을 제시한 것 또한 타당하다. (같은 이유로 본고가 지지하는 이번 결정의 단순위헌의견은 삼분기 이론을 지지하는 부분에서만큼은 타당하지 않다.)

3. 첫 번째 아쉬움: 결정이유로는 위헌, 그런데 주문은 헌법불합치

결국 이 사건 법정의견의 요지는 “상당수의 낙태는 태아의 생명권을 고려한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사로서 이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모든 낙태를 원칙적으로 처벌하는 형법 조항은 그 자체로 위헌무효가 되는 것이 맞는다. 법정의견과 같이 당해 조항의 위헌성을 상세하게 밝히면서도 부수적인 이유를 들어 헌법불합치 선언을 하고 당해 조항의 잠정적용을 명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

헌법불합치 선언은 법률의 위헌성이 인정됨에도 법률을 즉시 무효화하지 않고 국회의 개선입법을 기다리겠다는 선언이다. 헌법불합치 선언이 정당화되는 경우는 두 가지 뿐이다. 0 법률에 위헌적 부분이 있지만 법률 전체가 무효가 되면 이미 제공되던 합헌적 혜택마저 없어지게 되어 일단 그 혜택은 계속 남겨둘 필요성이 있는 경우 또는 0 법률에 합헌성과 위헌성이 혼재돼 있어 헌법재판소가 법률 중 위헌적 부분의 범위를 섣불리 단언하면 극심한 법적 혼란이 초래될 우려가 있는 경우가 그것이다. 낙태죄 처벌조항이 전자에 해당하지 않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법정의견은 ‘모든 낙태를 처벌하는 것은 위헌인데 지금 처벌조항은 사실상 모든 낙태를 처벌하고 있다’는 입장을 취하는바, 이는 곧 낙태죄 처벌조항의 위헌성이 명백하다는 것으로서 후자의 요건에도 해당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낙태죄 처벌조항에 관하여는 법정의견 스스로 제시하는 논거에 의하더라도 그 위헌성을 즉시 확인하는 단순위헌 선언을 했어야 맞는다. 법정의견이 그와 달리 헌법불합치 선언을 한 것은 처벌조항을 즉시 무효화하는 데 따르는 현실적 부담감을 피하고 국회로 공을 넘겨 ‘보다 더 합헌적인’ 개선입법을 촉구하고자 하는 의미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러한 부담이 헌법재판소가 즉시 제거할 수 있었던 위헌적 법률의 제거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번 결정의 단순위헌의견은 이 점을 지적하면서 “법정의견이 헌법불합치 선언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드는 사정은 모두 위헌임이 명백한 낙태죄 처벌조항의 잠정적용을 허용할 만한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일갈한다.

4. 두 번째 아쉬움: 낙태죄 처벌조항의 평등권 침해 여부 판단 회피

법정의견이 택한 헌법불합치 선언에 대한 비판은 법정의견이 낙태죄 처벌조항의 자기결정권 침해여부에 관해서만 판단하고 평등권 침해여부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은 데 대한 아쉬움으로도 이어진다. 법률의 평등권 침해에 따른 위헌성은 자기결정권 침해에 따른 위헌성보다 더 중대한바, 낙태죄 처벌조항의 평등권 침해를 함께 인정했다면 헌법불합치 선언의 정당성은 그만큼 낮아지고 그와 반대로 단순위헌 선언의 타당성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정의견이 드는 논거만으로도 낙태죄가 여성의 평등권을 침해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임신 과정에 남성과 여성이 함께 관여함에도 여성에게만 임신에 따른 부담을, 그것도 형사처벌이라는 가장 중한 형태의 부담을 부과하는 것은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을 다르게’ 대우하라는 평등원칙에 현저하게 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법정의견은 낙태죄 처벌조항의 자기결정권 침해를 이미 논증했다는 이유만으로 평등권 침해여부에 관한 판단을 아예 생략했다.

이번 결정에서와 같이 하나의 법률조항이 복수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기본권 경합 사례에서, 기존 헌법재판소 결정례는 하나의 기본권에 대한 제한이 다른 기본권에 대한 제한을 논리적으로 당연히 포함하는 경우라면 후자에 관한 판단은 생략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낙태죄 처벌조항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제한과 평등권에 대한 제한은 낙태를 둘러싼 사회적 논의의 장을 고려하면 엄연히 서로 다른 보호법익에 대한 제한이며, 법정의견 역시 그 문언을 통해 두 기본권의 제한이 서로 포함관계에 있지 않음을 자인한다. 그럼에도 법정의견이 별다른 보강논거 없이 평등권 침해에 관한 판단을 회피한 것은 위에서 살펴본 헌법불합치 선언의 미약한 정당성을 더는 약화시키지 않고자 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이는데, 이는 작은 오류를 덮기 위해 더 큰 오류를 범한 것에 다름아니다.

5. 결론에 대신하여

이번 결정의 합헌의견은 “임신은 남녀 공동의 문제이므로 남성의 아이 양육에 관한 책임을 강화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나, 그 때문에 낙태죄 형사처벌의 필요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밝힌다. 이에 관하여 법정의견과 단순위헌의견은 다음과 같이 반문할 것이다. “임신이 남녀 공동의 문제라면서 왜 국가형벌권은 여성에게만 처벌받지 않으려면 임신을 유지하라고 강제하는가?” 여기에 필자의 반문도 더하고자 한다. “그동안 국가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공동책임자인 남성에게 여성과 태아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고 적극적으로 요구한 적이 있는가?”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결정은 이들 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그 답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추동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국회의 개선입법이 그 답과 실천방안에 대한 지난 수십 년간의 논의를 잘 담아내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