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일터에서는 더 안정적인 삶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일터 밖에서는 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인은 때때로 체력적·심리적 한계에 부딪히기에, 온종일 일하거나 공부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조차 편안하게 쉴 수 없다. 경쟁사회 속에서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려면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러한 사회현상의 원인은 현대사회에서 이질성·타자성이 소멸되었고 그 자리를 모두 긍정성이 메웠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근대 초기의 사회는 이질성을 부정하고 타자의 부정성을 강조하면서 나와 ‘다른 것’을 배척하는 것이 주된 테제였던 ‘면역학적 규율사회’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본문 13쪽, 이하 쪽수만 명시)되어 과거의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 ‘비면역학적 성과사회’다. 이 사회는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개인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강조한다. 이러한 긍정성의 과잉은 서로 다른 개인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권장하지만, 결국에는 생산성을 무한히 향상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하나의 목표로 귀결된다.
그래서 한병철은 현대사회에서는 “비면역학적 배척”, 즉 이질성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과도한 긍정성에 대한 거부반응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울증, 신경쇠약 등은 현대인이 가능성의 포화(砲火)와 긍정성의 폭력 속에서 스스로를 소진하여 고갈시킨 나머지 무기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이 분석은 사회 제 분야가 성과주의, 나아가 성과지상주의적으로 통합되고 있는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인은 이러한 현실에 발을 맞추기 위해 늘 활동과잉·과잉주의(注意) 상태에 있는데, 이것은 매우 소모적이어서 만성적 정신피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28쪽, 강조는 인용자)
이 지점에서 한병철은 현대사회에서도 이질성이 원인인 “면역학적 배척”이 나타나고 있으며, 오히려 그 정도가 근대 전기에 비해 더 심하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근대 전기에 비해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그래서 각 분파·집단·계층의 차이가 더 많은 측면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서로 간의 충돌을 더 심화하고 있다. 각 집단이 각자와 상반되는 특성을 가진 집단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충돌은 미시적 층위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경우가 많지만,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전망했고 미국과 중동의 적대적 신경전과 군사 전쟁에서 볼 수 있듯 문명권 대 문명권의 거대한 충돌로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현대의 면역학적 배척은 ‘비면역학적 배척’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면역학적 배척은 말 그대로 나를 지키기 위해 ‘나와 이질적인 대상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면역학적 배척은 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개인을 동질화하려는 사회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즉, 긍정성 일변도의 사회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상대방의 차이와 약점이라는 부정성을 표면화하는 것이다. 이로써 현대인은 사회가 요구하는 ‘더 할 수 있다’는 가치에 순응하기를 멈춘다. 그리고 긍정성 과잉 사회의 기본적 틀을 수용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이루어지던 ‘비면역학적 배척’을 넘어, 그 틀 자체를 부정하는 면역학적 배척을 시작한다.
그래서 현대사회의 면역학적 배척은 과거의 그것보다 오히려 상대방의 부정성을 더 부각하고 더 격렬하게 공격한다. 겉으로는 ‘나와 다른 것’을 거부하지만, 실제로는 획일적 긍정성을 강권하는 사회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사회의 면역학적 배척이 본질적으로 긍정성의 과잉에 대한 거부반응임을 보여준다. 현대사회에서 면역학적 배척은 그 반응의 정도와 형태는 다르지만 비면역학적 배척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병철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면역학적 배척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현대사회를 타당하게 분석하고 있다.
한편 인간은 ‘깊은 심심함’ 속에서, 곧 겉으로는 어떤 행동도 하고 있지 않지만 정신적으로는 깊은 사색에 잠겨 있어 분주한 상태일 때 자신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인간에게 관조적 여유와 능동적 사유를 허락하지 않으며, 그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더 낼 것만을 요구한다. 그래서 현대인은 현실의 자신을 성과사회의 요구에 적응한 자신의 이상에 맞추기 위해 부단히 힘쓴다. 언제나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기에 자신은 언제나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언제까지든 더 노력해서 더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것을 자유로운 理想적 자아라고 믿지만, 이것은 사실 자기를 착취하는 異常자유다. 그러나 현대인은 현대사회의 “자유로운 강제 또는 강제하는 자유”(29쪽) 때문에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현대인은 “아니오[sic]라고 말할 수 있는”(52쪽) 주체성을 상실한 채 모든 충동과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옆과 뒤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폭주할 뿐이다. 그들은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이때 그들에게는 스스로를 추슬러 다시 일어나게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탈진한 채 무기력과 우울함에 침잠하며, 정신적 풍요가 아닌 육체의 건강과 같은 “벌거벗은”(113쪽) 욕망과 가치에 집착하게 된다.
이상의 논의는 현대사회의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한병철은 현대인이 자신도 모르게 이미 적응하여 익숙해진 탓에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쉽게 찾아내기 힘든 현대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논리적으로 밝힌다. 그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하여 자칫하면 경시하기 쉬운 현대사회의 근본에 대한 물음에 천착했고, 그 결과물로 기존 석학과 관점을 달리하는 새로운 개념적 틀을 제시했다는 점도 『피로사회』의 중요한 의의다. 덕분에 한병철은 “지금 현대인이 자유의지라고 믿고 따르는 것은 사실 긍정이라는 이름의 강제이며 사회의 폭력”임을 효과적으로 역설하고 있다. 독자에게 현대인이 ‘사회적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영혼으로서의 자아’를 찾아 부정성을 회복하여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생동하는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다만 한병철이 제시한 현대사회의 성과지향성을 탈피할 수 있는 방안의 실효성이 미약하다는 한계는 분명히 지적할 필요가 있다.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을 개인이 “자아를 개방”(68쪽)하여 “무위의 피로”(72쪽)에 도달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노력이 ‘무기력한 피로’를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피로’로 바꾼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무용한 해결책이다. 사회구조는 개인을 압도하기 때문에 개인은 사회구조의 문제를 알더라도 거기에 저항하기 어려우며, 설령 저항한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변화만으로 사회구조가 변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한병철은 긍정성의 과잉이 현대사회의 구조적 문제임을 논증했던 것에 걸맞게 해결책 역시 사회구조의 변화와 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구조적 개혁에서 찾았어야 한다. 개인의 변화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치밀하고 다층적인 대안을 개발하여 사회개혁에 앞장서야 할 지식인의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다.
또한 한병철은 무위의 피로가 가져올 긍정적 결과이자 미래 사회의 지향점으로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한] 우애”(70쪽)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현대사회에는 각 개인의 특성에 따른 차이가 엄존한다. 그 차이에 대한 명확한 분석과 인식 없는 “우애 회복”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무분별한 동질화를 초래할 수 있다. 이는 긍정성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개개인의 진정한 자아를 상실하게 할 우려가 있다. 타자와의 유대를 형해화하고 각 개인을 파편화하여 한병철이 스스로 지적한 지금 사회의 문제점을 답습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병철의 해결책에는 개인들이 서로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게 한 뒤 그 차이를 배려하면서 공존할 수 있게 하는 보완책이 필요하다. 이 보완책을 구체화할 방법이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한병철이 이러한 보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제시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
이처럼 『피로사회』는 중요한 논의를 시의적절하게 표면화하고 있지만 ‘2% 부족한’ 책이다. 문제의식의 참신함과 그 타당성에 대한 증명의 치밀함에 비해 현대사회의 성과지향성을 약화할 해결책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현대인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진정한 주체성은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구조적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그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에게 발전만을 강요한다면 그 결과는 플러스알파가 아니라 마이너스다. 그래서 현대인은 강제된 긍정성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한계라는 부정성을 찾아야 한다. 나아가 사회에도 그 부정성의 가치를 다시 심어 ‘자기착취 권하는 사회’를 무너뜨려야 할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할 최적의 방법은, 한병철이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현대인이 연대하여 차차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