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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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얼굴) 대통령 당선인은 18일 “과거 정권이 규제 완화라는 말을 했지만 구체적으로 실천을 안 했다”며 “과거식의 막연한 대책이 아니라 국민과 공무원이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내놓으라”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지시했다. 이 당선인은 이날 오전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간사회의에 참석해 이같이 강조했다.
(1월 19일자 3면 보도)
특히 그는 “대불공단에 가 봤는데 폴(전봇대) 하나 옮기는 것도 몇 달이 지나도 안 된다고 하더라”며 “산자부 사람이 나와 있어 물어봤더니 도(道)도 권한이 없고, 목포시도 안 되고, 산자부도 안 되고, 서로 (미루려다)하다 보니 폴 하나 옮기는 것도 안 된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아마 지금도 안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당선인이 강도 높은 규제 개혁 정책을 인수위에 마련하라며 ‘대불 공단의 전봇대’를 거론함에 따라 이 전봇대는 규제 개혁의 상징이 돼 버렸다. 이 당선인은 왜 ‘대불 공단의 전봇대’를 거론했을까. 그리고 취임 한 달여를 앞둔 대통령 당선인에게 이 전봇대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06년 전봇대의 기억
2006년 9월 19일. 이 당선인이 서울시장을 그만두고 지방 강연회를 다닐 때였다. 전남 영암의 대불공단에서 경영인 간담회를 하던 그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여러분 애로가 너무 크네…. 미안해요. 세금 내고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불편을 주는 내가 미안해요. 미리 알았으면 부끄러워서 안 왔을 것 같아…. 모르고 왔어요.”
참석자들이 “선박 조립용 블록을 실은 대형 트레일러가 다니는 골목길이 좁은 데다 전봇대마저 있어 통행이 어렵다” “트레일러가 다니기엔 교량이 약한데, 보강해 달라고 해도 감감무소식”이란 하소연을 쏟아낸 뒤였다.
그는 “(전봇대 대신) 전선을 지하에 묻어 달라, 교량 좀 보강해 달라…. 얼마나 작은 문제인가. 산업 정책의 문제도 아니고…. 이래 놓고 무슨 일자리를 만든다고…”라고 말했다.
당시 기억은 이 당선인에게 너무도 생생했다. 참석자들 말 때문이 아니라 그가 몸소 체험한 일이기도 했다. 대불공단에 들어설 때 그가 탄 승합차는 한동안 멈춰서야 했다. 대형 트레일러가 전봇대를 피하느라 아슬아슬하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차 안에서 그 광경을 다 지켜봤다. 지난해 3월 펴낸 자서전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에까지 이 얘기를 담았다.
#2007년 전봇대의 기억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지난해 10월. 광주에서 선대위 발대식에 참석한 그는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또 언급했다.
“내가 보니까 한 달이면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였다. 선박용 대형 블록을 싣고 골목을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이 조선소가 있는) 거제도로 가는 시간보다 더 걸린다. 그래도 해보려고 노력하는 기업인들을 보면서, 나 같으면 집어 치우겠더라.”
오랫동안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활동을 해온 이 당선인에게 전봇대 문제가 뿌리 깊은 규제의 덫으로 다시 한번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전봇대의 오늘
18일 오후 4시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
전라남도 전략산업과 김동주씨는 “이 당선인이 지적한 전신주가 있는 곳은 폭이 14m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블록 수송 차량을 위해선 20m 이상 확보돼야 해 가로등과 가로수를 옮겼는데, 전신주는 영암군과 한전이 협의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영암군에서 일하는 한 공무원은 “한전을 비롯한 관련 기관들과 협의하고 행정 절차를 밟는 한편 예산을 확보하는 데 시일이 걸리고 있을 뿐”이라 고 주장했다. 공단에 입주한 업체 관계자는 “전선·전신주에 대해 계속 민원을 냈지만 예산 타령만 하고 해결이 안 되고 있다”며 “입주업체들로선 발등의 불처럼 시급한 일인데 공무원들이 자기 일이라면 그렇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인수위에서 이 당선인이 예상했던 대로 대불산업공단의 업체들은 전봇대로 인해 여전히 불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대불산업공단 안에는 지금도 높이 12m짜리 전봇대가 600여 개 서 있다.
고정애 기자, 영암=이해석·천창환 기자
◆블록=선박을 구성하는 철 구조물. 최근의 선박 제작은 여러 개의 커다란 블록을 지상에서 미리 만든 뒤, 이를 조선소로 옮겨 조립하는 방법을 쓰고 있다. 블록은 점차 대형화되는 추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