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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대법원 판결에 관한 단상

Super:H 2020. 1. 30. 17:45

* 대법원 보도자료 보기: 클릭

일각의 우려와 달리 판결 자체는 오히려 수사기관의 과도한 수사, 특히 (특별)검사의 무리한 기소를 경계하는 취지이다. 이는 범죄인의 처단보다 무고한 피고인의 무죄를 확인하는 데 중점을 두는 형사법의 대원칙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타당하다.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검찰개혁의 큰 줄기가 종국적으로는 그 대원칙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판결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체부장관 등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하고 실제로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문화예술인에 대한 지원을 배제한 행위 등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본질에 해당하는 부분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번 판결이 무죄취지 파기환송을 한 부분은 특별검사가 위 피고인들이 위 지원배제 과정에서 실무자들에게 특정 인물의 명단을 제출받은 행위 등 부차적인 부분까지 별개의 범죄에 해당한다고 기소한 부분, 즉 사건의 부차적인 부분에 국한된다. 즉,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특별검사가 사안의 본질적 부분을 따로 기소했고 그 부분이 유죄로 인정되는 이상 부차적인 부분까지 별도로 유죄 인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선언할 것일 뿐,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및 그에 따른 불이익 부과 행위가 공무원의 공무 관련 범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은 그대로 유지했다. 그래서 파기환송 후 항소심을 거치더라도 피고인들이 받을 선고형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이번 판결이 우려스러운 진짜 이유는 이번 판결이 설시한 직권남용 관련 범죄 성부를 판단하는 법리가 '사법농단' 관련 일련의 형사사건에 그대로 적용될 것이라는 데 있다. 이번 판결에서 대법원은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구성요건이 (1) 직권을 남용하여 (2)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1)에 해당하는 행위라도 (2)에는 해당하지 않을 수 있고 그런 경우에는 적어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는 성립할 수 없다고 설시했다. '사법농단' 관련 사건들은, 사법행정 라인에서 상위직에 있는 판사가 하위직에 있는 판사에게 사법행정 관련 업무지시를 했는데, 그 지시가 각각 독립적 국가기관인 개별 판사의 직무상 양심과 독립을 침해할 여지가 커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상위직 판사가 직권을 남용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결과 하위직 판사가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인지 여부는 법리적으로 다툴 여지가 있다. 그래서 이번 판결의 판시가 '사법농단' 관련 사건에도 엄격하게 적용된다면 당해 사건 피고인들인 상위직 판사들에게 무죄 판결이 속출할 수 있다는 합리적 예측이 가능하다. '사법농단'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판결 결과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그 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