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세계의 현 국면이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민주주의가 포획된 국면이라는 맑스주의의 진단에는 동의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온전히 독립시켜야 한다는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에는 공감한다. 맑스주의가 인정하는 계급의 실재와 노동자정치의 중요성 또한 (과거 맑스가 제시했던 그 개념으로서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신계급'으로 바꾼다면 타당하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그 방법론으로 제시하는 사회주의로의 사회변혁 - 생태주의와 여성주의를 포괄하거나 중도에 가까운 진보진영의 다른 논리를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주 목표이자 지향점이 사회주의인 - 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사회주의의 이상 그 자체는 충분히 아름답고 착취구조에 대한 분석 및 그것을 무너뜨리기 위한 노력도 의미 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그 구조만을 부각시키고 급진적 변화에 매몰된 나머지 '지속가능한 개혁'에 필수적인 점진적, 참여민주주의적 개혁을 폄하하는 일방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은 소련에서만 나타났던 국지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가 자유를 희생해서 평등을 이룩하려 하기에 갖는 본질적 한계다.
그래서 아직 완전히 성숙한 생각은 아니지만, 지금으로서는 민주주의 속에서 사회주의의 목표를 잘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진보가 지향해야 할 지점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유럽식 사민주의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로 변질된) 진정한 자유주의의 실현을 위한' 국가의 감독자, 심판자 역할을 강조하는 질서자유주의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 개인의 자율성'만' 강조하는 구조는 잘못됐고 바뀌어야 하지만, 그 자율성이 갖는 근본적 장점까지 무너뜨리는 사회주의적 개혁은 민중의 생각과 참여를 억압하는 개악이 된다. 평등은 맹목적 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기회의 평등'일 때 진정 가치가 있다.
시민사회 제 영역의 가치들이 함께 반영되려면 그 영역 내부는 물론 각 영역 사이에서도, 나아가 각각이 정책에 직접 반영되는 정치 영역에서도 모든 목소리가 자유롭게 나올 수 있는 참여민주주의적 요소가 필요하다. 모두 공생하는 사회는 특정 의견이 '리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의견이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보는 모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목표고 그 최선의 방법론이 '배제된' 계급의 공정경쟁과 패자부활을 돕는 거대행위자 견제와 국가개입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 공공영역은 필요한데, 사회 제 분야에 대해 통합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무한경쟁이 승자독식으로 귀결되는 역설을 극복하고 모두에게 가능한 한 실질적으로 같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설득력 있는 논리가 완성된다.
*이 논의를 2013/12/25 - 발전적 질서자유주의 비판: '자유'의 '실질적' 평등을 위하여 에서 한 단계 더 확장하였으니 참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