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지난 수십 년간은 신자유주의의 시대였다. 비단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국가의 구조와 역할 면에서도 신자유쥬의의 영향은 지대해서, 국가에 대한 개별 국민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과거 근대국가가 최초로 출현했던 시기의 야경국가론과 유사한 ‘新야경국가론’이 지배적이었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국가와 자유를 추구하는 시장은 본질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신자유주의의 시대에는 시장이 국가보다 우위에 서면서 국가의 역할이 축소된 것이다.

시장의 한계를 보정한다는 명분으로 국가가 그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고 그 역할을 확대한다면 국민의 자유는 그만큼 제한된다. 국가가 공동체 속에서 최대한 많은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출범한 정체(政體)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렇게 되면 국가는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인류는 문명을 이룩하고 나서부터 줄곧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그것을 일정 부분 제한하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이것은 ‘완전한’ 자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정 의미 있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도 일정한 개입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확산·심화되어 분야를 불문하고 자본이 최우선의 가치로 기능하는 현 시대에 통제받지 않은 시장의 한계는 더욱 두드러진다. 경제적 부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정치사회적 권력이 편중되고, 그 권력은 불평등한 구조를 보다 평등하게 개선하기 위해서 사용되기보다는 보다 더 불평등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더 많은 국민에게 진정한 평등, 최소한 이상적인 평등에 가까운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국민 생활 전반에 개입해야 한다. 최근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유럽형 사회민주주의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그것을 반영하여 정치권도 부족하게나마 관련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은 그 필요를 방증한다. 이때 앞서 언급했듯 국가의 역할은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한 것이지 무조건 평등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강조할 때 일어나는 무질서만큼이나 평등을 기계적으로 강조할 때 일어나는 모순과 사회적 불만도 심각하다. 민주주의의 두 가지 핵심 원리인 자유와 평등은 둘 중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현대의 적극적 국가가 채택해야 할 운영 방향은 다음과 같다.

 

(1) 개인 및 개인들의 공동체를 위한 복지국가

현대에 요구되는 적극적 국가상은 국가를 구성하는 개인 및 그들이 결성하는 소규모 공동체들의 복지를 보장하는 복지국가다. 현대의 적극적 국가는 과거 국민들의 생활 전 영역에 관여하면서 ‘국가’를 최우선에 두고 국가를 위해서 국민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던 절대왕정이나 절대주의 독재체제와는 달라야 한다. 그러한 국가는 본 필자가 위에서부터 여러 번 강조하는 국가의 목표―국민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보장해 주기 위한 ‘자유의 평등화’ 실현―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현대국가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자유시장경제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쟁에서의 패배자 또는 낙오자들에게도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리고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권리들을 보장해 주는 것이 현대국가의 1차적인 의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대국가는 그들에게 더 많은 사회보장과 자립 기회, 즉 일종의 ‘패자부활전’을 제공하여 다시 자발적으로 경쟁에 뛰어들어 더 높은 차원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약자들을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한다.

물론 국가는 ‘모든 국민’의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하고, 그 때문에 보편적 복지를 기반으로 한 선별적 복지로의 패러다임 변화가 장기적으로 필요하지만, 현대국가의 초점은 우선적으로 여러 형태의 소수자와 약자에 있어야 한다. 이른바 ‘있는’ 국민들은 국가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가지더라도 자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국가는 법 규정에 글로 씌어진 ‘자유의 평등화’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선별적 복지 수혜 기준에 해당하지 않는 소수자와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들도 넓은 의미에서는 법이 도와주지 않는(또는 도와줄 수 없는) 약자에 해당한다. 그래야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할 것을 천명하는 우리 헌법 전문(前文)은 사문화(死文化)되지 않는다.

 

(2) 헌법상 국민주권 원리를 강화하는 상향적(bottom-up) 민주국가

국민주권 원리는 몽테스키외로부터 태동하여 사회계약론자들을 거쳐 프랑스혁명 및 각국의 민주화운동으로 확립된 확고하고도 유서 깊은 민주국가의 원리다. 우리나라 또한 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국가는 현실적으로 불가피하게 대의민주주의 원리를 실행하고 있는데 국민들이 대표자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면서 ‘모든 권력이 대통령과 국회로부터 나오는’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가 서구 선진국에 비해 그 정도가 심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그 나라들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민들이 “대표자를 뽑는 선거 때만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고 그 후에는 정치적 노예로 전락”한다는 루소의 말은 과장된 측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완전한 거짓은 아니다. 그래서 현대국가가 더 많은 국민의 자유를 더 평등하게, 더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개별 국민들의 의사가 국정운영에 더 충분하게, 더 효과적으로 반영돼야 한다. 그래서 현대국가에는 각종 민-관합동위원회와 같은 참여민주주의적 요소가 보강되어야 하고,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부정할 수 없는 만큼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국민의 사후통제권을 강화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준정부기관, 공사(公司), 준공영 공기업 등의 형태로 국가의 권력이 탈집중화되는 현상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현상은 넓은 의미에서 국가권력이 국민에 더 가까이 위치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국가권력의 중심이자 최상층부가 자신들이 모든 영역에서 모든 권력을 행사할 수 없기에 그것을 더욱 효율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서 ‘아웃소싱’하고, 그 피위임기관들이 국가권력의 통제를 ‘비공식적으로’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가권력이 약화되거나 국민들이 국가권력을 실질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행사 방식이 비공식적으로 바뀌면 국가가 국민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 엘리트의 이익만을 위해서 운영되고, 심할 경우 사유화될 수도 있는 위험이 따른다.

따라서 현대국가는 이와 같은 국가권력의 아웃소싱이 진정 투명하게, 국민을 위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민의 직접 참여와 감시를 활성화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의견에 대해서도 언로(言路)를 열어둘 뿐만 아니라 그 의견이 합리적이라면 정부 정책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상향적 의사결정(decision making) 및 정책결정(policy making)이 이루어져 국민주권 원리가 실현될 수 있다.

 

이상 현대국가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국가의 성격 두 가지를 살펴보았다. 이들 원칙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한 헌법의 역할에 대해 첨언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헌법은 국가구조와 국가운영원리를 규정하는, 법체계상 최상위 규범이자 정치사회적 영향력 또한 매우 큰 법이다. 복잡한 현대사회 전반에 대한 국가의 목표와 그것을 실천하기 위한 간단한 방법론을 압축적으로 담아야 하는 특성상, 헌법 그 자체는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헌법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려면 그 추상적 문구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현실에 적용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특히 ‘진정한 자유의 실현을 위한 자유의 평등화’, 그리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국민중심 복지국가와 상향적 국민참여국가라는 목표는 현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인 만큼 대다수 국가의 헌법 조문에서 직접 도출할 수 없다. 이들 목표는 유권, 평등권, 참정권, 국민주권의 원리 등을 규정한 조문을 현대 정치현실에 맞게 확장하여 해석할 때 헌법적 정당성을 가지며 더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이 범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로써 널리 실천되려면, 시간이 감에 따라 보수화될 가능성이 높은 국가구조를 계속 지속가능하고 민주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끊임없이 신선한 자극을 가하는 시민사회의 노력과 참여와 요구가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들불처럼 커지던 국민의 분노를 일단 가라앉히기 위해 좋은 말과 원리를 한데 모으기는 했으나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지에 대한 논의가 부족했던 ‘87년 체제’를 바탕으로 국가구조가 운영되고 있고 그 결과 현재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역할이 특히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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