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생각

한 시간 만에 살펴보는 유럽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Hanns W. Maull 박사 특강

Super:H 2013. 9. 24. 20:45
  9월 24일, 서울대학교 83동 506호에서 국제정치학개론 수업의 일부로 진행된 Hanns W. Maull 교수님의 '유럽의 과거, 현재, 미래' 특강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선 이번 특강은 생각지도 않은 과제 리딩 저자 직강(!)이었다. 교수님은 현재 독일 Trier 대학 대외정책학·국제관계학 교수이자 학장으로 재직 중이시며, 국제 유럽·북미 문제 연구소 Transatlantic Academy 전직 연구원, 독일 정부 대외정책 자문위원회 현직 부위원장 등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세계 정상급 학자시다. 이런 유수의 학자가 강의실까지 찾아와서 특강을 하시는 건 정말 흔치 않은 기회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한 시간짜리 강의가 60년+α를 아우르면서 다양한 관점과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들이 산만하지 않게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서 또 한 번 감탄했다. 비교정치와 국제정치, 유럽정치 분야에 오래도록 천착하신 교수님의 남다른 깊이가 절로 느껴지는 고농축 강의였다.

  강의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1. 유럽의 과거
- 2차대전 종전 후 독일 붕괴, 국가주의적 유럽 질서 붕괴
- 이후 한국전쟁 특수와 냉전 기간 미국의 지원으로 전후 권력공백 해소,
- 그리고 새로운 사회민주주의+자유주의적 질서 안착.
- 그 결과 국가 간 성공적인 경제, 군사 협력체제 구축.
- 안정적 집단안보체제에 기초한 civilian power로서의 유럽 공동체 구성.

2. 유럽의 현재
- 인구 감소, 성장 둔화, 경제위기, 국민 지지 상실
- 개별 국가들의 '하나의 유럽' 정체성 약화
- 존재론적(existential) 위기에 직면

3. 유럽의 미래
- 낙관론 및 그 근거: 풍부한 자원과 유의미한 국제적 영향력, 유럽 사회의 다양성과 유연성(resilience), 독일의 강력한 리더십, 외부 위기의 부재와 미국의 지원
- 비관론 및 그 근거: 노화(aging)·경화(sclerotic)된 사회, 정치적 불안정, 경제 분야를 제외한 범유럽 리더십의 부재, 우크라이나·벨로루시 등 까다로운 이웃 국가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교수님의 다각적, 종합적 관점은 더욱 빛을 발했다. 질의응답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Q. 교수님은 현재의 세계정세를 미-중 양극(bipolar)체제로 보고 계시는데, 이를 다극(multipolar)체제로 볼 가능성은 없는지?

A. multipower 체제라면 모를까 multipolar 체제라고는 보지 않는다. 물론 최근의 국제정세가 미국의 힘이 타 국가로 이동하는 추세인 것은 맞다. 그리고 미국과 중국에도 각각 내부의 정치적 약점이 있다. 유럽은 이미 중요한 국제관계의 행위자(global player)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유럽이 미-중에 맞먹는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미-중을 제외한 다른 어느 나라도 하나의 power를 넘어 독보적 polar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다'극'체제라는 말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Q. 유럽이 civilian power라면 무력을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데, 유럽 국가들은 NATO의 이름으로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인들의 인종청소에 맞서 무력을 사용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A. Civilian power가 military power의 반대 개념이라는 것은 가장 흔한 오해다. Civilian power는 국제관계를 민주적 협상과 법치로 운영될 수 있도록 civilze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하다면 civilian power로서의 유럽 국가들도 각국간 합의에 의해(multilateral) 방어적 목적으로(defensive)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 Civilian power는 어느 한 국가의 일방적 결정에 의하거나 (unilateral) 방어적 목적이 아닌(non-defensive) 무력 사용에 반대할 뿐이다.

Q. 어제(9.23.) 있었던 독일 총선 결과 메르켈 총리의 3선 연임이 확실시된다. 교수님은 강의 중 메르켈 총리의 리더십이 유럽 통합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셨지만, 오히려 범유럽 이슈에 대한 메르켈의 강경한 노선이 향후 유럽 통합을 더 저해하지 않을까?

A. 메르켈 총리의 강력한 리더십은 현재 필요악이라고 하겠다. 메르켈 총리의 정책이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알 수 없고, 그녀는 조금만 잘못하면 의도한 것과 정반대로 역효과를 낼 수 있는, 까다롭고(tricky)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tightrope walk)에 놓여 있다. 그러나 현재 유럽의 난국을 헤쳐 나갈 다른 대안이 없다. 근래 유럽 정치는 다른 좋은 선택(option)을 불가능하게 하여 메르켈 총리의 방법론만 쓸 수 있을 정도의 상태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메르켈 총리가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하다.

Q. PIGS의 경제위기를 고려할 때 현 상황에서 EU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경제적 측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측면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유럽이 다시 통합을 강화하려면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 세부 합의점을 어떤 측면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A. 경제적 측면은 현재 가장 시급하게 해결되어야 할(urgent) 측면이지 가장 중요한 측면은 아니다. 경제는 유럽 공동체의 유일한 구성요소가 아니므로, 경제가 무너진다고 해서 유럽 공동체 자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공동체를 지탱하는 또 다른 기둥(second pillar)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유럽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 안보 분야의 협력이며, 앞으로 합의점도 그 분야에서 찾아야 한다. 실질적으로 합의하여 결정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도 유럽은 외교, 안보 문제를 공동으로 논의하고 관련 정책을 결정하는 이사회(Board)를 운영하고 있다.

  이상의 강연과 질의응답을 통해 교수님은 유럽 통합 문제를 더 날카롭게,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주셨다. 특히 네 번째 질문은 내가 던진 것인데, 덕분에 한 국가와 지역의 운명을 좌우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자기보호를 위한 현명한 대외관계임을 되새길 수 있었다. 정치외교학부생으로서 늘 잊지 않아야 할 명제를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한 느낌이었다. 현대 유럽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을 한눈에 조망하게 해 주신 Maull 교수님과 그를 초빙해 주신 윤영관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