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생각

사회과학도가 바라본 영화 <더 테러 라이브>

Super:H 2013. 8. 1. 16:13

   모든 예술은 어떤 형태로든 사회를 반영한다. 그래서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갖는 내재적 의미와 함께 사회를 투영하는 외재적 의미를 함께 음미할 때 그 의미가 배가된다. 사회와 국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고, 전공도 정치외교고, 그에 대해서 배우는 것도 더 많아지다 보니 이제 웬만한 영화 역시 표면적 비주얼과 내용보다 이면에 담긴 감독의 의도를 더 중점적으로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점에서 <더 테러 라이브>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것이 많다.

  개인이 강자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는 사회 구조를 극복하기란 참 힘들다. 그 개인이 약자라면 자기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당연히 그렇고, 그 개인이 강자라면 본인이 이미 그 구조의 일원이 되어 있어 구조를 깨고 나오기가 곱절로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 문제인 이유는, 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를 깨지 못하면 많은 희생이 따르더라도 '높으신 분들' 중심의 사회가 변함없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피해는 언제나처럼 약자들이 본다.

   언론은 위 구조가 엄존하는 작은 사회이며, 전체 사회 구조의 불평등성을 확대 재생산한다. 때때로 '이슈'는 그 자체의 중요성과 무관하게 부각되기도 하며, 국민의 이익이 아니라 언론사나 언론계 고위인사나 사회 고위층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사장되거나 조작되기도 한다. 언론은 많은 경우 공정한 뉴스 메신저가 아니다. 약자들이 강자들에 대항하는 경우 더욱 그렇고, 약자들의 목소리가 커질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아직 사회에 발을 본격적으로 내딛지 않은 배운 사람들이 합심해서 그 구조에 균열을 만들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 균열은 매우 작을 것이고 그 자체로 어떤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없을 때 빚어지는 결과는 <더 테러 라이브>의 결말이 보여주듯 참담하다. 그때 정의(正義)는, 그 정의(定意)가 무색하게도, 그리스 시대 트락시마쿠스의 말처럼 "강자의 이익"으로 퇴색하고 만다. 그래서 거대 구조의 오점을 지적하는 외침은 아무리 작더라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 목소리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언론을 포함한 제 사회 분야 안팎에서 끈질기게 지속되어야 한다.

 

  +덧. 하정우는 멋있다. 연기도 잘한다.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70퍼센트는 하정우가 분한 앵커 윤영화가, 20퍼센트는 윤영화 주변 SNC 방송국 인물들과 테러의 원인을 제공한 '높으신 분들'이, 나머지 10퍼센트는 테러범 박‘노규’가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일용직 건설노동자 박노규는 목소리로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고, 긴장감을 조성함으로써 플롯 전개에서 윤영화와 함께 양대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비중을 1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는 이유는, 영화의 결말이 남기는 여운이 그 정도로 씁쓸하기 때문이다. 그 씁쓸함을 한층 더하는 이유이자 위 문단에서 테러범의 이름에 따옴표―박노규가 아니라 박'노규'다가 붙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영화를 보고 확인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