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생각나는 대로의 단편적인 생각
우발성과 우연성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우발’은 ‘우연히 일어남. 또는 그런 일.’을 뜻한다. 이에 따르면 삶의 우발성은 삶의 우연성을 전제하고 있다. 우연, 즉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들이 발생하는 성질이 바로 우발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삶 속에서 인과 관계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겪는다. 그래서 우발성과 우연성은 일맥상통하고, 앞으로 이 글에서도 ‘우연’을 ‘우발’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로 했다.
인간관계의 우연성
삶의 많은 부분은 우연적이다. 그 중에서도 우연성이 특히 두드러지는 부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맺은 인간관계다. 매일 아침 반갑게 인사하며 만나는 어드바이저 선생님부터 많은 수업을 함께 들으며 웃고 떠드는 행정반 친구들,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초등학교·중학교 동창들까지, 우리는 수많은 친구들을 정말 우연히 만났다.
물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우연히 만났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우연적 만남에서 시작된 인간관계가 우리의 인맥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에게 인간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생각해 보면, 우연성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임에 틀림없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우연성이 촉발한 인간관계는 우리의 사회적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직간접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사실을 보면, 우연성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구임이 분명하다.
때로는 슬픈 우연성
삶의 우연성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인연들을 떠올리면서 우연성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보고 있다. 그런데 그 인연 하나하나에 얽힌 기억을 더 찾아보려던 찰나, 우연성에 어두운―아니지, ‘슬픈’에 더 가까운―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것 때문에 원치 않는 실패를 경험한다. 아무리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뼈아픈 실패를 직시하고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고통스럽다. 실패의 필연성을, 그리고 그 원인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삶의 우연성을 멋대로 끌어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을 덮는다. 우리가 겪은 실패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운이 나빠서’ 발생한 불가항력적 결과라고 애써 생각하고는 그것을 믿어 버리는 것이다. 이때의 우연성은 무늬만 우연일 뿐 사실은 필연이며, 불편한 진실을 감추는 위장술이다. 이 ‘우연성을 가장한 필연성’은 거짓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본질이 인간관계의 우연성처럼 밝지 않으며, 그 뒤에 가려진 실패의 참모습만큼이나 슬프다.
그래도 우연은 아름답다
그래서 우연성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슬픈 우연성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했겠지만, 그것은 언젠가는 우리에게 알려졌을 것이고 알려져야 했을 우리 삶의 엄연한 진실이다. 우리 삶이 백 퍼센트 완벽하지 않은 이상, 삶에 그런 결점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모든 우연은 여전히 아름답다. 분명한 필연만 존재했다면 너무나도 딱딱하고 재미없고 각박했을 우리 삶에 부드럽고 다채로운 낭만과 감정을 불어넣어주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초등학교 적 남모르게 앓았던 짝사랑의 열병에 필연적 원인이 있다면, 그래서 그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는가? 행복하기는커녕 오히려 첫사랑의 낭만이 깨져 허무해질 것이다.
그렇다. 확실한 것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 삶에는 짝사랑처럼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반(反)이성적’ 현상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이성적 현상들보다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일상을 아름답게 채색해 주는 것이 바로 우연성이다.
그래서 모든 우연은, 언제나,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