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전쟁을 선포하며 이를 서방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에 비유했다.
한편 오사마 빈 라덴은 알 카에다의 투쟁을 미국과 서방의 십자군 전쟁에 맞서는 지하드(성전·성스러운 전쟁)라고 규정했다.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과거 가톨릭교가 저지른 네 가지 범죄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가 바로 십자군 전쟁이었다.
이처럼 지금으로부터 1000여 년 전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뜨거운 정치적·종교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십자군 전쟁의 실상은 어떠했으며, 십자군 전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십자군 전쟁은 과연 성전? 성지탈환 빙자한 침략?
십자군 전쟁은 셀주크 튀르크라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기독교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중세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벌인 전쟁이다. 전쟁의 발단은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이 기독교도들의 순례를 방해한다고 탄원한 데서 비롯됐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이를 받아들여 성지를 탈환하자고 호소했고, 각계각층의 유럽 기독교인이 이러한 종교적 호소에 응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십자군 전쟁이 순수한 종교적 열의에서 비롯한 자발적 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실제로 1차 십자군 원정은 여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원정 가운데 가장 종교적 열정이 높았다. 또 1차 원정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데 유일하게 성공했기 때문에 나머지 원정들(학자에 따라 8차∼13차까지 나눔)을 대표하는 사례로 여겨진다. 또한 유럽은 십자군 운동으로 인하여 당시 유럽보다 앞서 있던 동방과 접촉하고 교류함으로써 중세의 긴 잠에서 깨어나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게 되는 근세의 기초를 놓았다.
이와 같이 십자군 전쟁이 명예롭고, 진취적이며, 개척적인 원정이라는 생각은 뒷날 더욱 확대되어 이교도가 점령하고 있는 땅을 기독교도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활동을 십자군 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런 유럽의 십자군 개념은 유럽 문명이 세계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세계 십자군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19세기 이후, 십자군 운동이 서구 문명의 수호자이며 이슬람 세계에 세워진 십자군 왕국들은 서구 문명의 전초 기지라는 사고방식이 나타나게 된다. 이라크 전쟁을 십자군 원정으로 표현한 부시 대통령은 이러한 인식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인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인 학자들과 이슬람 학계는 십자군에 대한 유럽 기독교인의 설명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십자군 전쟁의 상(像)이란 근세에 서구 문명이 세계를 제패하면서 퍼뜨린 유럽 중심주의적 관점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십자군 원정대와 충돌해야 했던 이슬람 세계의 입장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유럽인들이 이슬람 세계를 침략한 것으로 단정한다. 최근 이슬람 학자들은 십자군의 침입을 중동 지역에 한정하지 않고, 유럽이 전 이슬람 세계를 지속적으로 침략한 것이라고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19세기에 중동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행동도 십자군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십자군 운동은 당시 확산되고 있던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도의 반격이자 침략이며, 이 침략에 대하여 지하드(성전)를 통해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래 예루살렘은 기독교가 발생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7세기에 마호메트가 창시한 이슬람교가 예루살렘을 비롯한 중동 지역 전체에 전파되면서 이 지역민들의 다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11세기까지 약 400년 동안 이 지역의 주인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내세웠던 십자군 운동의 명분인 성지 탈환은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엄연한 침략일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시각에서 보면 1차 십자군 원정은 이들의 목표인 예루살렘 탈환이 달성해야 할 유일한 목표이었겠지만, 동시에 십자군 원정의 역사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유혈이 낭자했던 원정이라는 점도 인식되어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도시에 있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한 결과 거리를 지날 때 피가 발목에 잠길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몇몇 고교 교과서 십자군 전쟁의 동기가 순수한 종교적 열정보다는 그 이면에 놓인 다양한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십자군 원정 초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열정에 들떠 중세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농노 및 부랑자들로 구성된 ‘누더기 십자군’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세속적 이해관계라는 확실한 원동력이 없었다면 십자군 원정이 그토록 오랫동안(약 200년) 지속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르바누스 2세를 비롯한 후대의 교황들은 당시 경쟁자였던 동방정교회를 자신의 관할 아래 흡수 통합해 세력권을 확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교황의 호소에 응했던 많은 기사 당시 서유럽 봉건제의 장남상속이라는 관행 아래서 상속권을 부여받지 못했던 이들로 미지의 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야망을 공공연하게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성장하던 도시 상인들이 시장을 개척하고자 하는 욕구가 십자군 원정을 부채질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세속적 동기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사례가 바로 4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 원정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집트였는데, 십자군은 이 원정에 필요한 돈을 베네치아 상인들로부터 빌렸다. 그 후 십자군 원정대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돈을 갚기 위해 같은 기독교 국가인 헝가리를 침략했다. 이 행위는 너무나 뻔뻔스러운 것이어서 교황조차 이들 십자군을 파문해야 했다. 그럼에도 십자군 원정대는 베네치아 상인들의 끊임없는 요구대로 이번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해 이 도시를 약탈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십자군이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비잔티움 제국조차 십자군 원정대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되었고, 이는 동로마와 서로마 교회의 분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4차 십자군 원정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례는 1212년에 원정에 나섰던 소년 십자군인데, 이들 가운데 태반이 가는 도중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아이들은 상인들의 간교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에 대한 유럽 중심적 시각과 이슬람의 시각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에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시각 가운데 어떤 관점이 실상에 가까울까?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제7차 교육과정의 세계사 교과서는 십자군 전쟁에 관해, 위의 두 시각 가운데 어느 한 쪽에 편향되어 있지는 않지만, 예전보다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정보를 더 많이 수록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은 군사적으로는 명백하게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유럽은 이슬람 세계의 앞선 문화를 접하고, 십자군 이동 경로를 따라 다양한 교역 활동이 촉진되면서 경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에 찬란한 전성기를 누렸던 이슬람 세계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된 시발점이 된 셈이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슬람의 영구적 성전 ‘지하드’▼
다른 종교가 이슬람 위협 땐 목숨 건 싸움 무슬림 개개인의 자발적 참여 성격 강해
이슬람교도는 세상을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다르 알이슬람(Dar al-Islam)과 아직 이슬람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이슬람화해야 할 지역인 다르 알하르브(Dar al-Harb)로 구분한다. 그리고 그들은 비 이슬람 지역인 다르 알하르브를 다르 알이슬람으로 바꾸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에는 전투적인 방법만이 아니라 평화적인 선교, 상거래, 외교 등의 모든 방법이 포함되지만 유럽과의 관계에서는 주로 그들의 성전 개념인 지하드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유럽은 몇 차례 생존의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슬람인들의 지하드는 이슬람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세계 어디에서든 이슬람이 위협받으면 일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지하드는 이슬람의 방어와 확산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이슬람교도이면 누구나 참여해야 하며, 지도자의 지휘 없이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에 비해 십자군은 교황의 호소에 호응한 종교적이며 집단적인 움직임이었으며, 자신의 죄 사함을 믿고 움직였다. 또한 거기에는 성지 순례에 나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이슬람의 지하드는 영구적인데 비해 십자군은 특별한 사건 때문에 발생한 일시적인 움직임이다. 기독교의 성전이 억압받은 기독교도들과 성지를 해방하는 방어적인 수준인데 비해, 지하드는 이슬람 세계를 방어할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이 이슬람의 계율을 인정할 때까지 싸우면서 이슬람 세계를 확장하려는 공격적 개념이다. 그 때문에 기독교와 싸우는 이슬람 지배자에게는 대단히 필수불가결한 정신적 무기였다.
물론 십자군 운동을 이슬람의 지하드처럼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같은 사람들은 십자군 운동을 이슬람의 지하드처럼 영구적이고 공격적인 개념으로 확대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격적인 지하드 개념과 방어적인 성전의 개념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일어났던 상황은 상당히 달랐다. 중세의 이슬람 사회는 서유럽 사회보다 훨씬 덜 폐쇄적이었으며, 타종교에 대하여 관대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이슬람교는 기독교, 유대교가 발생한 땅에서 이 두 종교를 바탕으로 발생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가 이 두 종교와 마찬가지로 일신교이며 구약성서와 예언자로서 예수의 지위를 숭배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대교도와 기독교도가 이슬람의 우위를 인정하기만 하면, 그들의 종교 행위를 탄압할 수 없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반면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기독교도는 자신들이 우위를 점한 지역에서 다른 종교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기독교와 유사한 다른 종교나 종파일수록 더욱 이단시하며 배척하는 경향이 많았다.
특히 기독교의 발생 지역과 최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지역이 이슬람화했다는 사실과, 기독교와 이슬람의 유사성은 십자군 전쟁 시에 기독교가 이슬람에 대하여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십자군 전쟁의 동기와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슬람과 기독교는 지금까지 서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