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 한복 입은 詩 속 여인 vs ‘몸빼’ 차림의 농촌 아낙
한국여인의 삶은 어느 쪽이었을까
○ 생각의 시작
누군가 여러분에게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물씬 풍기는 여인을 상상해 보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를까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단아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의 모습이 떠오르나요? 다음의 시를 한 번 볼까요?
이 시는 고전적인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는 시라고 배웠을 것입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요.
하늘을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附椽) 끝 풍경(風磬)이 운다.
처마 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 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 자주빛 호장을 받친 호장 저고리
호장 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살살이 퍼져 내린 곧은 선이 / 스스로 도라 곡선을 이루는 곳.
열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
치마 끝에 곱게 감추운 운혜(雲鞋)* 당혜(唐鞋)*
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
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호접(胡蝶)
호접인 양 사풋이 춤을 춰라, 아미(蛾眉)를 숙이고…….
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살아 / 눈 감고 거문고를 골라 보리니
가는 버들인 냥 가락에 맞추어 / 흰 손을 흔들지어다.
*운혜: 앞코에 구름 모양의 무늬가 있는 여자의 마른신
*당혜: 앞뒤에 당초문(唐草紋)을 새긴 가죽신
[조지훈, ‘고풍의상’]
○ 의문 하나
한국인의 의복은 서양의 양복이나 일본의 기모노나 중국의 그것과는 다른 한국만의 특징적인 옷이지요. 다른 나라의 의복과는 다르며 한국인 모두의 ‘공통적’인 복장이었으니 우리의 전통적 의상이라 해도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한국적 여인의 모습이라면, 다른 나라의 여성과는 좀 다르면서도 우리 한국 여인들의 보편성을 담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위 시에 등장하는 여인이 한국 여인의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것일까요?
○ 개인적인 경험 하나
필자가 민통선 근방에서 군복무 하던 시절에 대민 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해가 질 무렵, 부대로 돌아가기 위해 산골짜기를 따라 경운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는데 저 멀리 지는 저녁 해를 등지고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경운기 한 대가 있었습니다. 막걸리 한 잔을 걸친 기운에 그 경운기를 바라보는 감회는 뭔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경운기가 바로 우리 앞에 왔을 때 저는 순간적으로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경운기를 운전하고 있던 사람은 ‘몸빼’ 바지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동여 맨 젊은 아낙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아! 저것이 바로 우리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한국적 여인의 보편적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저 모습이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또 우리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 이런 생각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 중 어떤 것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조차 못한 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생각을 가로막는 힘을 갖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한국적 여인의 모습을 떠올릴 때도 작용합니다. 위 시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이 곧 우리 어머니의 모습이고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라고 착각을 하게 만들지요.
여기서 여러분 어머니의 모습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그 모습과 위 시의 여인의 모습을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어머니의 모습과 시 속 여인의 모습 속에서 공통점이 찾아지나요? 여러분의 어머니는 요즘의 어머니니까 위 시의 여인과는 다른 모습인 걸까요?
앞밭에는 당추(唐추)심고 뒷밭에는 고추 심어,
고추 당추 맵다 해도 시집살이 더 맵더라.
둥글둥글 수박 식기(食器) 밥 담기도 어렵더라.
도리도리 도리 소반(小盤) 수저 놓기 더 어렵더라.
오 리(五里) 물을 길어다가 십 리(十里) 방아 찧어다가,
아홉 솥에 불을 때고 열 두 방에 자리 걷고,
외나무다리 어렵대야 시아버니같이 어려우랴?
나뭇잎이 푸르대야 시어머니보다 더 푸르랴?
시아버니 호랑새요 시어머니 꾸중새요,
동세 하나 할림새요 시누 하나 뾰족새요.
시아지비 뾰중새요 남편 하나 미련새요,
자식 하난 우는 새요 나 하나만 썩는 샐세.
귀 먹어서 삼년이요 눈 어두워 삼년이요,
말 못해서 삼년이요 석 삼년을 살고 나니,
배꽃 같던 요내 얼굴 호박꽃이 다 되었네.
삼단 같던 요내 머리 비사리춤이 다 되었네.
백옥 같던 요내 손길 오리발이 다 되었네.
열새 무명 반물 치마 눈물 씻기 다 젖었네.
두 폭 붙이 행주치마 콧물 받기 다 젖었네.
[시집살이 노래]
○ 생각은 여러 갈래…
‘고풍의상’에 나오는 여인과 ‘시집살이 노래’에 나오는 여인 중 누가 더 우리 옆에 있는, 그리고 옛날에도 ‘살아있었던’ 여인의 모습에 가까울까요?
어쩌면 ‘고풍의상’ 속에 묘사된 여인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 남성들의 희망사항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한편으로는 ‘그림 속의 꽃’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삶의 현장에서 온갖 사회적 제약을 감내해 온 인고(忍苦)의 존재였던 건 아닐까요.
유영권 청솔 아우름 통합논술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