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 또는 최순실(개명 후 최서원) 개인의 문제이기 이전에 국가권력 최상층부 구조의 문제다. 청와대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국정을 ‘스톱’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진정한 보좌진이 한 명도 없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현재 참모진이 내놓고 있는 해명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이상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거나, 알아챘어도 그것을 시정하려 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만약 전자라면 무능한 것이고 후자라면 정도(正道)를 향한 의지가 없는 것인데, 둘 중 어느 쪽이든 참모진이 마땅히 해야 할 역할을 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번 사태가 건설적 함의를 가지려면 참모진이 대통령의 권위에 떨지 않고 진언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의사결정구조를 새로이 마련하기 위한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 이번 사태를 박 대통령이나 최 씨 개인의 잘못으로 결론짓고 끝낸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유병언과 구원파에 모든 책임을 돌린 결과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그대로 안전불감증이 만연하고 컨트롤타워가 신뢰를 얻지 못하는 한국사회를 보라.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대통령과 각 참모의 역할을 확인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하는 청와대 정책결정과정의 투명한 공개다. 하지만 국정에는 ‘투명한’ 공개가 오히려 국익에 반하는 중차대한 외교·안보 관련 기밀사항이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국가권력 최상층부에서 결정한 정책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사후에라도 그 오류를 돌이킬 수 있는 너무 늦지 않은 시점에 바로잡을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차선책이다. 그 시스템이 현재 마련돼 있지 못한 것은 대통령 권력이 임기 중반에는 무소불위라 할 수 있을 만큼 정점에 올랐다가 임기 후반에 이르면 무(無)에 가깝게 힘이 빠지는 현행 5년 단임제의 특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최소한 일정 부분 있다.
지금 개헌 논의가 유의미하다면, 권력구조의 이러한 문제를 포함해서 그동안 누적되어 온 사회경제적 문제를 다수 노정하기 시작한 87년 체제의 한계를 총체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시점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이는 뒤집어 말하면 권력구조 개편을 위한 장기적 관점에서의 개헌 플랜은 필요하지만 권력구조 개편‘만’을 위한 근시안적인 개헌 계획은 현재 한국사회가 맞닥뜨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정권 자체의 민주적 정당성이 흔들리는 위기에 처한 이 시점에 급하게 제안된 개헌 논의를 환영할 수 없는 이유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한국에서는 행정부와 입법부 간 상호 견제에 따른 권력집중 완화라는 장점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양자 간 교착으로 인한 비효율이라는 단점이 주는 손해보다 훨씬 크다. 그래서 한국 상황에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동행을 전제로 하는 의원내각제 및 다수당의 독주를 용인하여 형식상의 분리를 무색케 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이원집정부제/분권형 대통령제가 맞지 않으며, 양자의 견제와 균형을 전제로 하는 대통령제를 유지하는 것이 맞다. 개헌 정국은 현행 대통령제가 수반하는 ‘제왕적 대통령’의 출현과 그에 뒤이은 레임덕 현상을 완화하기 위한 수정·보완책을 논의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 4년 중임제든 무엇이든 궁극적인 목적은 권력을 제대로 분산할 수 있는 새로운 대통령제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 주권재민의 원칙이 실현되는 민주사회에서 그와 같은 수정·보완은 권력구조만 바꿔서는 불가능함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다. 주권자로서 권력을 창출하는 국민들의 실질적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재편, 그리고 이를 위한 보다 넓은 시각의 종합적 개헌이 동반돼야만 헌법정신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 이러한 종합적 개헌을 위해서라도 민주사회의 근간을 위협하는 이번 사태는 더디더라도 확실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자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의 하야 또는 탄핵소추를 요구하는 일각의 목소리는, 실제로 대통령이 불명예 궐위되어 더 큰 혼란을 야기해도 상관없다는 ‘떼쓰기’로 볼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민주적 정당성이 다시 정립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열망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5년 임기는 이제 484일 남았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제(諸) 언론이 근래 보기 드물게 정권의 약점을 널리 알리고 있는 현 상황은 87년 체제의 장점을 계승하고 단점은 개선한 새로운 체제의 도래가 머지않았음을 보여주는 희망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으면 막을 수 없다는 격언은 언제나 유효하지만 말이다. "정권은 짧지만, 우리(국민-필자 주)가 이끌어갈 대한민국의 미래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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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시국선언문
(https://www.facebook.com/snuchong/posts/1197905300281544)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