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에 의하면, 개인의 모든 행동은 권력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수동적인 것이다. 계보학적으로 살펴보면 권력이 개인의 생활 전반에 침투해서 우리를 감시하려 하기 때문에, 거기에 익숙해져 '감시의 내면화'가 이루어진 나머지 개인 스스로 권력이 원하는 방향에 맞춰 행동한다는 것이다. 이 감시는 타인이 타인의 뜻에 따라 우리를 조종하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분명히 부정적인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감시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적정 수준의 감시는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하다. 모든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에, 어느 순간 평상시와 달리 자기도 모르게 나른해지고 해이해져 섣부르게, 또는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 조여왔던 마음의 고삐를 잠시 놓친 그 순간, 우리는 그 고삐를 다시 잡고 정신을 재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원래 가려던 삶의 길로 돌아오기 위해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하지만 우리가 잊기 쉬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감시이다.
하지만 그것이 푸코가 말한 '개인에 대한 권력의 감시', 그리고 그것에의 무의식적인 동조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한 감시는 사람들을 그들이 가고자 하는 삶의 길 대신 그들을 이용하여 잇속을 채우려는 권력이 원하는 삶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어느 시인이 일본의 압제에 격분하여 연필 가는 대로 총독부를 비판하는 시를 쓰려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그만뒀다고 하자. 그 시인이 마음을 다잡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써 그는 그가 진정 원하는 것과는 반대로 일제의 지배를 조금이나마 더 공고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처럼 자기 외부의 감시 때문에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은 강자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참된 깨달음을 주어서 우리를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이끄는 감시는 어떤 감시인가? 그 감시는 우리가 마음 속에 품은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하는 '능동적 감시'이다.
이 능동적 감시를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실히 설정해야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만족되어야 한다. 그래야 앞서 예를 든 시인처럼 타인의 요구와 직간접적 회유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신념을 초지일관 지킬 수 있고, 그때 비로소 스스로 정한 처음의 방항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우리의 뜻에 따라 감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면화된 타율적 감시를 경계하면서 그 감시에 의해 '구성된 주체'를 파괴한 후 각 개인이 스스로를 '구성하는 주체'로 변모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푸코의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자신에 대한 능동적 감시를 할 수 있을 만큼 내면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늘 자신의 신념을 되새기면서 지금 자신의 위치와 상태는 어떤지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지금 자신이 어떠한 이유로든 방황하고 있지는 않은지, 특히 누군가의 힘에 못이겨 자신의 신념을 버리려고 하지는 않았는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힘을 재확인하고, 자신을 무너뜨리려는 외부의 압력에 맞서 굳은 의지를 계속 지켜나가기로 다짐할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외부의 '포스'를 이기지 못해 잠시 휘청했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는 그 흔들림을 발판 삼아 자신이 원하는 삶을 향한 힘찬 도움닫기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지금의 흔들림은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앞서 확고히 해 둔 자신의 뜻을 되새기면서 잠시 느슨해졌던 의지라는 이름의 신발끈을 더욱 단단히 고쳐맬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처럼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수동적 순응을 유도하는 외부의 감시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감시의 위력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기의 이름은, '우리의,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능동적 감시이다. 그리고 '감시'보다 아름다운, 그 무기의 다른 이름은 -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챘을지도 모르겠지만 - 능동적 자기반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