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생각

진정한 <퍼펙트 게임>은 야구장 밖에 있다

Super:H 2012. 3. 11. 11:55


퍼펙트 게임
감독 박희곤 (2011 / 한국)
출연 조승우,양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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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1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209구 11피안타 8탈삼진(고 최동원)과 232구 10피안타 10탈삼진(선동열)의 역투를 펼친 당대 최고의 투수들, 그리고 그들의 15이닝 완투와 2-2 무승부. 한 치의 양보도 없었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두 선수의 땀과 열정에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벅찬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두 선수의 아름다운 모습도, 뿌리 깊은 지역감정을 잠시 무력화시킨 스포츠맨십의 힘도 아니다. 바로 영화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각하'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3S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를 출범시켜 어두운 진실을 호도하고 국민을 우롱했다. 그는 해태와 롯데의 라이벌 구도를 포함한 프로야구 속 승부의 세계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도록, 아니 못하도록 해서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연장하려 했던 것이다.

그 날도 그는 많은 국민들처럼, 그러나 그들과 완전히 다른 불순한 의도를 갖고 최동원과 선동열의 대결을 관심있게 지켜봤을 것이다. 그에게 승자와 패자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것, 그에 따라 민들이 그 각각의 편으로 나뉘는 것이었다. 그래야 국민들이 국가권력과 싸우는 대신 자신들끼리 싸울 테고, 그 동안 진실을 더 깊이 은폐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최동원과 선동열, 롯데와 해태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4시간 56분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선수들은, 그리고 국민들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던 '각하'의 예상과 달리 함께 울었고 함께 읏었다. '각하'가 애써 숨기려 했던 것을 그들 모두가 직접, 함께 찾아낸 것이다. 그 날 그들은 하나가 되었고, 그 동안 억눌렀던 (혹은 억눌렀던) 공통된 소망을  확인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그들의 열기는 '각하'를 당황하게 하고도 남을 만큼 맹렬했다.

그 해 5월 말을 기점으로 대학생들이 산발적으로 벌이던 민주화 시위는 전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한데 합쳐진 국민의 정신력은 궁지에 몰린 '각하'가 필사적으로 동원한 막강한 물리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9일, 수많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는 승리한다. 최동원과 선동열의 게임의 승자는 최동원도 선동열도 아닌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화 <퍼펙트 게임>은 야구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영화 속 게임은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두 투수의 명경기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이기도 하다. <퍼펙트 게임>이 그리는 1987년 5월이 관객의 눈시울을 뜨거워지게 하는 진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영화 후반에 잠시 등장하는 각하의 당황한 표정에서, 최동원의 커브와 선동열의 직구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국민의 힘이 '각하'의 압제를 무너뜨렸음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