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1952)는 85일간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하다 엄청난 크기의 청새치를 건져올리는 데 성공하지만 그것을 상어에게 모두 빼앗기고 마는 한 노인의 이야기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서 인간의 욕망과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을 찾아볼 수 있으며, 긍정적인 사고와 희망 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테마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노인에게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인간의 노력과 희망의 중요성을 찾아내며, 작품의 교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년을 비롯한 노인 외의 다른 인물들의 역할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이 해석은 ‘노인과 바다’의 작품 전반에 드러난 주제의식을 고려해 볼 때 타당하다. 그러나 다른 문학 작품들처럼 ‘노인과 바다’ 역시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문학 작품의 해석은 독자들의 배경지식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독자들의 삶의 모습이 모두 다른 만큼 그들의 지식과 생각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처럼 나 역시 이 작품을 일반적 해석과 다소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였다. ‘노인과 바다’의 전개를 이끌어나가면서 작품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두 주요 인물, 산티아고와 마놀린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1) 산티아고
산티아고는 여느 노인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어부이다. 이는 그가 젊은 시절부터 ‘쿠바의 도시 하바나에 있는 작은 어촌’에서 어업에 종사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산티아고의 이러한 평범함은 작품의 의미를 더욱 배가시킨다. 작품이 평범한 인물에 의해 평범한 삶 속에서 전개되는 만큼, 작품이 주는 교훈이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산티아고가 평범하기 때문에 그가 겪는 일들이 역설적으로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범인(凡人)들처럼 보잘것없어 보이고 그의 긴 삶 동안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운에 체념하지 않으며,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는다. 자신을 조롱하고 심지어 ‘운이 다한 사람’으로 단정짓는 이웃들을 원망하거나 야속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에 대해 수군거리는 마을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그의 조수였던 소년 마놀린이 부모님의 요구 때문에 그를 떠난다고 했을 때 그가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아이는 부모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러니 내 생각 하지 말고 부모님의 말씀에 따르거라.”고 말하면서 마놀린에게 서운해하는 대신 그의 입장을 이해한다.
산티아고는 계속되는 고통과 시련을 인내하며 자신을 믿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마침내 그의 기다림은 그에게 그의 배보다도 더 큰 청새치라는 결실을 맺는다. 노인은 이를 ‘행운’이라고 일컫지만, 사실 그가 큰 청새치를 낚아올린 것은 그의 인내와 끈기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는 상어의 습격과 뼈만 남은 청새치라는 더 큰 시련을 겪는데, 이때도 그는 뭇 사람들처럼 좌절하거나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인 채 다음 번 고기잡이를 위해 쌓인 피로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이처럼 산티아고는 자기 자신에 대한 굳은 믿음을 바탕으로 어려운 상황을 꿋꿋이 견뎌내는 끈기, 열정, 그리고 인내의 소유자이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옳다는 신념 아래 물질적 빈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데 힘쓴다. 그를 편안하게 하는 꿈 속 행복한 사자들의 웃음과 아프리카의 바다에서 파도 소리가 그의 이러한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작품에 드러나 있듯이 사자와 바다 꿈, 즉 그가 추구하는 내면적 성숙은 그가 고된 하루를 보낸 후에도 웃을 수 있고 다음날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2) 마놀린
마놀린은 산티아고의 어구(漁具)를 손질하고 그에게 미끼를 가져다주는 등 산티아고의 낚시를 돕는 조수이다. 그는 가시적 성과를 원하는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산티아고보다 고기를 더 잘 잡는 다른 낚시꾼의 배에 탐으로써 현실에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산티아고의 마음가짐을 이해하며, 초라한 외면에 가려진 산티아고의 훌륭한 내면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마놀린은 내면적 성숙을 이룬 산티아고를 역할 모델(role model)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산티아고가 배를 곯지는 않는지, 아픈 것은 아닌지 늘 걱정하면서 그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현하고, 진심어린 존경심을 담아 산티아고와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다.
또 마놀린은 산티아고와 공감하면서 그와 뜻을 같이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마놀린이 현실적 이유로 산티아고의 배를 떠나 다른 배를 타야 하는 상황에서도 산티아고를 생각하면서 그를 따르고 그를 돕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마놀린은 자신이 타고 있는 배에서 거둘 수 있는 더 큰 물질적 성과의 유혹에 빠져 산티아고를 등한시하지 않는다. 그는 노인이 추구하는 내면적 가치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마놀린은 현실적 삶을 살아가면서도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망각하지 않고 항상 되새기는, 산티아고에 버금가는 ‘된 사람’이다. 이것이 마놀린이 스스로 ‘노인과 바다’의 주제의식을 표현함은 물론 산티아고의 아름다움을 더욱 구체화·극대화할 수 있는 이유이다. 노인을 우러러보는 마놀린의 모습을 통해 독자들은 산티아고의 성숙미를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놀린은 노인의 초라한 겉모습과 그를 비웃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에 가려진 산티아고의 훌륭한 내면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산티아고는 그가 겪는 고난과 역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꿋꿋이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있으며, 마놀린은 산티아고의 훌륭함을 부각시킴으로써 산티아고가 걷고 있는 일이 참된 인생의 길임을 분명히 한다. ‘노인과 바다’는 인간의 열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의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의 힘뿐만 아니라 내면적 성숙의 아름다움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이러한 의미들은 사실 인간의 삶 그 자체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각자의 이상을 품고 있으며, 살아가면서 도전과 실패, 시련의 극복과 새로운 도전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노인과 바다’를 읽은 후 산티아고처럼 훌륭한 내면을 갖고 마놀린처럼 서로의 장점을 부각시키면서 함께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 그것이 헤밍웨이가 진정 바라던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