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조선일보>
토요 추적 '한국판 CSI'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96명이 연 22만건 처리… 외국에서도 국과수 실력 인정
'亡者들의 변호사' 부검 의사들, 하루 10명꼴 '死者와 대화'
27일 오후 4시쯤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 3층 영상분석실 정면 벽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 한 아파트 현관을 찍은 폐쇄회로(CC)TV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한수 영상분석실장이 어두운 영상을 밝게 조정하자,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화면이 뚜렷하지 않아 이목구비까지는 식별되지 않았다.
한 실장이 마우스를 움직여 동일한 CCTV가 다른 날짜에 찍은 그 남자의 얼굴 윤곽선을 가져다 화면 속 남자의 얼굴 위에 겹쳐 올려놓았다. 각도를 조금 조정하자 그 윤곽선은 남자의 얼굴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윤곽선의 주인은 서울 마포구 김씨 모녀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전 프로야구 선수 이호성씨. CCTV 화면 하단의 시계는 '2008년 2월 18일 오후 7시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양후열 문서영상과장은 "이제야 이호성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환호했다.
◆2시간 먼저 출입 밝혀내
경찰은 이날까지 이씨의 공범이 있을 지 모른다는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이 지금까지 확인한 CCTV 화면에서 이씨가 김씨 모녀 아파트로 처음 들어간 시각은 2월 18일 오후 9시14분, 그리고 다시 나온 시각이 9시20분이었다.
아파트 7층에 있는 김씨 모녀 집으로 올라가 그들을 살해한 뒤, 시체를 대형 가방에 넣고 다시 내려오는 데 6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날 영상 판독으로 이씨가 2시간 앞서 아파트로 들어가 세 모녀를 살해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안양 어린이 살인사건, 이호성씨의 모녀 살인사건, 남대문 방화, 이천냉동창고 화재 ….
최근 벌어진 대형 사건·사고 수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가 있었다. 국과수는 현장에서 발견된 작은 단서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해왔다. '한국판 CSI(과학수사대)'의 본부인 셈이다.
1955년 설립된 국과수 조직은 크게 법의학부와 법과학부로 구성돼 있다. 그 아래에는 시체 부검을 담당하는 법의학과, 유전자분석과, 세계 최초로 머리카락을 이용한 마약검사 기법을 개발한 마약분석과, 교통사고 차량의 파손부위 등을 분석해 사고 상황을 재현하는 교통공학과, 문서영상과, 범죄심리학과, 약독물과, 화학분석과, 물리분석과 등 9개 과(科)가 있다. 전체 근무 인원은 296명. 이들 가운데 의학, 생물공학, 화공학, 전자공학, 약학 전공의 석·박사 출신 연구원만 165명에 이른다.
◆'딱 걸린' 허경영의 사진 조작
이날 영상분석실에선 지난해 대선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허경영(59)씨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에 대한 분석도 진행됐다. 이중 연구관이 사진을 조금씩 확대하자, 허씨의 얼굴은 윤곽만 흐려졌지만 부시 대통령의 얼굴은 거의 모자이크처럼 변했다.
이 연구관은 "다른 사진에서 부시 대통령의 얼굴을 오려다 붙였기 때문에 배율을 높일 때 서로 다른 변화를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눈을 잘 보세요. 허경영씨의 눈은 플래시를 받아 눈이 붉게 변해있지만, 부시 대통령의 눈은 그렇지 않지요. 다른 장소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는 허씨에 대한 다음 재판에서 이같은 분석결과를 제출하고 증언할 예정이다.
우리 국과수의 능력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2004년 쓰나미가 동남아시아를 덮쳤을 때에는 자국민을 잃은 39개 국가를 대표해 유전자 분석을 통한 신원 확인을 맡은 기관이 우리 국과수였다. 이달 초 네팔에서 발생한 유엔 평화유지활동 헬기 추락 사고 때도 국과수가 사망자 신원 확인 업무를 맡았다.
◆"시체 냄새가 배 사람 만나기 꺼려진다"
오후 5시쯤, 조용하던 국과수 분위기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안양 초등학생 유괴·살인사건 피의자 정모(39)씨가 4년 전 살해했다고 자백한 군포의 40대 여성의 시신 일부가 발견된 것이다.
국과수로 옮겨진 시신이 맨 처음 향한 곳은 부검실. 부검은 '사람이 왜 죽었나'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익사한 사람과 동사한 사람, 또는 독극물에 의해 숨진 사람의 내장은 색상을 비롯해 상태가 모두 다르다. 멍이나 물집도 살아있을 때만 생긴다. 그래서 부검을 집도하는 법의관들은 스스로를 '망자(亡者)들의 변호사'라 부른다.
국과수에서는 작년 한 해 3576구의 시신이 부검대에 올랐다. 법의관 1명이 연간 188구의 시신을 부검한 셈이다.
유일한 여성 법의관인 박혜진(38)씨는 "부검이 많이 몰리는 날은 옷과 머리카락에 시체 냄새가 배 사람들 만나기가 꺼려진다"며 "여름에는 아예 사무실에 옷을 여러 벌 갖다 놓는다"고 말했다.
◆유전자분석 시약을 확보하라!
'군포 40대 여성'의 시신은 유골만 남은 상태여서, 간단한 부검 절차만 거치고 유전자분석실로 옮겨졌다. 연구원들이 치과에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소형 전기드릴로 유골의 깨끗한 부분만을 따로 깎아낸 뒤, 칼슘을 제거하는 용액에 담갔다.
한면수 유전자분석과장은 "딱딱한 뼈에서는 유전자(DNA) 추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뼈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짧으면 하루, 길면 열흘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유전자 분석을 할 때는 혈액이나 침, 입안 껍질세포 등을 시약과 섞어 분석기에 넣고 돌리는데, 유전자분석과는 매년 8~9월이면 이 시약이 떨어져 홍역을 치른다. 지난해에도 준비해둔 시약 19억 원어치가 9월에 동나, 경찰청에 손을 벌려야 했다. 그만큼 분석 건수가 많았다는 뜻이다.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확보한 단서는 확실한 증거 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국과수에 들어오는 감정 의뢰 건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1999년에 10만 건을 넘어섰고, 지난해에는 22만여 건에 달했다. 서중석 법의학부장은 "범죄, 특히 과학수사를 다룬 영화·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범죄가 갈수록 정교해져 그만큼 정밀 감식이 필요한 경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가) 이틀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본 것 같다. 더 이상 정밀한 과학 수사 기법은 범죄 예방 차원에서 비밀"이라며 웃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직원들이 3차원 스캐너를 사용해 사람의 얼굴 윤곽을 본뜨는 실험을 하고 있다. CCTV 등에 잡힌 인물의 얼굴을 육안으로는 알아볼 수 없더라도 실제 얼굴을 스캔해 얻은 3차원 그래픽을 화면 속 인물과 대조하면 동일인 여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
토요 추적 '한국판 CSI' 국립과학수사연구소
296명이 연 22만건 처리… 외국에서도 국과수 실력 인정
'亡者들의 변호사' 부검 의사들, 하루 10명꼴 '死者와 대화'
27일 오후 4시쯤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 3층 영상분석실 정면 벽에 걸린 대형 스크린에 한 아파트 현관을 찍은 폐쇄회로(CC)TV 화면이 돌아가고 있었다. 한한수 영상분석실장이 어두운 영상을 밝게 조정하자,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화면이 뚜렷하지 않아 이목구비까지는 식별되지 않았다.
한 실장이 마우스를 움직여 동일한 CCTV가 다른 날짜에 찍은 그 남자의 얼굴 윤곽선을 가져다 화면 속 남자의 얼굴 위에 겹쳐 올려놓았다. 각도를 조금 조정하자 그 윤곽선은 남자의 얼굴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윤곽선의 주인은 서울 마포구 김씨 모녀 일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한 전 프로야구 선수 이호성씨. CCTV 화면 하단의 시계는 '2008년 2월 18일 오후 7시 3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양후열 문서영상과장은 "이제야 이호성 사건을 마무리했다"고 환호했다.
◆2시간 먼저 출입 밝혀내
경찰은 이날까지 이씨의 공범이 있을 지 모른다는 의심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이 지금까지 확인한 CCTV 화면에서 이씨가 김씨 모녀 아파트로 처음 들어간 시각은 2월 18일 오후 9시14분, 그리고 다시 나온 시각이 9시20분이었다.
아파트 7층에 있는 김씨 모녀 집으로 올라가 그들을 살해한 뒤, 시체를 대형 가방에 넣고 다시 내려오는 데 6분밖에 걸리지 않은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날 영상 판독으로 이씨가 2시간 앞서 아파트로 들어가 세 모녀를 살해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안양 어린이 살인사건, 이호성씨의 모녀 살인사건, 남대문 방화, 이천냉동창고 화재 ….
최근 벌어진 대형 사건·사고 수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가 있었다. 국과수는 현장에서 발견된 작은 단서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해왔다. '한국판 CSI(과학수사대)'의 본부인 셈이다.
1955년 설립된 국과수 조직은 크게 법의학부와 법과학부로 구성돼 있다. 그 아래에는 시체 부검을 담당하는 법의학과, 유전자분석과, 세계 최초로 머리카락을 이용한 마약검사 기법을 개발한 마약분석과, 교통사고 차량의 파손부위 등을 분석해 사고 상황을 재현하는 교통공학과, 문서영상과, 범죄심리학과, 약독물과, 화학분석과, 물리분석과 등 9개 과(科)가 있다. 전체 근무 인원은 296명. 이들 가운데 의학, 생물공학, 화공학, 전자공학, 약학 전공의 석·박사 출신 연구원만 165명에 이른다.
◆'딱 걸린' 허경영의 사진 조작
이날 영상분석실에선 지난해 대선에서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허경영(59)씨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나란히 찍은 사진에 대한 분석도 진행됐다. 이중 연구관이 사진을 조금씩 확대하자, 허씨의 얼굴은 윤곽만 흐려졌지만 부시 대통령의 얼굴은 거의 모자이크처럼 변했다.
이 연구관은 "다른 사진에서 부시 대통령의 얼굴을 오려다 붙였기 때문에 배율을 높일 때 서로 다른 변화를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의 눈을 잘 보세요. 허경영씨의 눈은 플래시를 받아 눈이 붉게 변해있지만, 부시 대통령의 눈은 그렇지 않지요. 다른 장소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그는 허씨에 대한 다음 재판에서 이같은 분석결과를 제출하고 증언할 예정이다.
우리 국과수의 능력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2004년 쓰나미가 동남아시아를 덮쳤을 때에는 자국민을 잃은 39개 국가를 대표해 유전자 분석을 통한 신원 확인을 맡은 기관이 우리 국과수였다. 이달 초 네팔에서 발생한 유엔 평화유지활동 헬기 추락 사고 때도 국과수가 사망자 신원 확인 업무를 맡았다.
◆"시체 냄새가 배 사람 만나기 꺼려진다"
오후 5시쯤, 조용하던 국과수 분위기가 갑자기 분주해졌다. 안양 초등학생 유괴·살인사건 피의자 정모(39)씨가 4년 전 살해했다고 자백한 군포의 40대 여성의 시신 일부가 발견된 것이다.
국과수로 옮겨진 시신이 맨 처음 향한 곳은 부검실. 부검은 '사람이 왜 죽었나'를 밝혀내는 작업이다. 익사한 사람과 동사한 사람, 또는 독극물에 의해 숨진 사람의 내장은 색상을 비롯해 상태가 모두 다르다. 멍이나 물집도 살아있을 때만 생긴다. 그래서 부검을 집도하는 법의관들은 스스로를 '망자(亡者)들의 변호사'라 부른다.
국과수에서는 작년 한 해 3576구의 시신이 부검대에 올랐다. 법의관 1명이 연간 188구의 시신을 부검한 셈이다.
유일한 여성 법의관인 박혜진(38)씨는 "부검이 많이 몰리는 날은 옷과 머리카락에 시체 냄새가 배 사람들 만나기가 꺼려진다"며 "여름에는 아예 사무실에 옷을 여러 벌 갖다 놓는다"고 말했다.
◆유전자분석 시약을 확보하라!
'군포 40대 여성'의 시신은 유골만 남은 상태여서, 간단한 부검 절차만 거치고 유전자분석실로 옮겨졌다. 연구원들이 치과에서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소형 전기드릴로 유골의 깨끗한 부분만을 따로 깎아낸 뒤, 칼슘을 제거하는 용액에 담갔다.
한면수 유전자분석과장은 "딱딱한 뼈에서는 유전자(DNA) 추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뼈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짧으면 하루, 길면 열흘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유전자 분석을 할 때는 혈액이나 침, 입안 껍질세포 등을 시약과 섞어 분석기에 넣고 돌리는데, 유전자분석과는 매년 8~9월이면 이 시약이 떨어져 홍역을 치른다. 지난해에도 준비해둔 시약 19억 원어치가 9월에 동나, 경찰청에 손을 벌려야 했다. 그만큼 분석 건수가 많았다는 뜻이다.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확보한 단서는 확실한 증거 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국과수에 들어오는 감정 의뢰 건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1999년에 10만 건을 넘어섰고, 지난해에는 22만여 건에 달했다. 서중석 법의학부장은 "범죄, 특히 과학수사를 다룬 영화·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범죄가 갈수록 정교해져 그만큼 정밀 감식이 필요한 경우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가) 이틀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본 것 같다. 더 이상 정밀한 과학 수사 기법은 범죄 예방 차원에서 비밀"이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