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생각

덴마크식 황금삼각형 모델의 한국화(化)를 위한 제언

Super:H 2014. 12. 27. 21:29

아래는 개인적으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덴마크식 황금삼각형 모델을 우리나라 현실에 어떻게 변용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든 생각.

- 우선 1996년 노동법 (날치기) 개정 이후 시작된 현재의 편법적 도급/파견/(재)하청/비정규 계약직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황금삼각형 모델의 핵심인 고용시장 유연화는 우리나라에 섣불리 적용할 수 없다. 우리나라 노동시장 및 관련 법제가 표면적으로 그다지 유연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사용자 측에서 그 법제들을 피해 인력 충원 및 순환을 충분히 빨리 시키고 있다는 것과 노동자 측에 그리 유리하지 않은 법적/사회적 환경이라는 속사정을 고려하면 한국 노동시장은 사실상 이미 꽤 유연하다. 이 상태에서 노동시장의 추가 유연화는 '사회적' 생산성의 증대가 아니라 사용자 측의 자본 재생산의 증대만 의미할 뿐이다. 그 재생산분이 결코 사회로 환원되지 않음은 지금의 체제에서 분명하다.

- 그런데 지금 한국 상황에서 노동시장을 덜 유연하게 만들자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더 나쁜 수다. 그랬다가는 그나마 있는 질 낮은 일자리들마저 죄다 없어지고 극소수의 정규직들만 남아 사회적 고용불안정이 더 심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정규직마저 불안하게 만드는 노동시장 유연화 대신 이미 많은 계약직 등 불안정한 고용자들의 고용안정성을 어느 정도 확보해 주는 것이 현실적인 대책일 것으로 보인다. 황금삼각형 모델의 한 축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 영위를 보장할 수 있을 정도의 복지'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대책이 곧 복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덴마크에서는 그것이 (재취업을 위한 직업교육과 연계된) 실업수당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조금 더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비정규직이나 (말로만) 개인사업자 혹은 하청근로자인 사실상의 원청 소속 노동자들 등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노동자들이 '계약직'인 지위에서도 계약직이 누릴 수 있는 만큼의 고용의 질과 그 안정성을 보장받도록 하는 게 더 적절하다. 실업수당은 재원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최소한의 삶을 영위하기에도 부족할 공산이 크므로, 그것만 복지혜택이라고 내세우는 건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대신 완전히 안정적인 고용상태는 아니더라도 그 지위에 해당하는 만큼은 4대보험과 생활임금(최저임금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게 현실이라 최저임금으로는 부족하다)을 보장받고, 계약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최우선 해고대상이 되는 일은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 이렇게 하면 황금삼각형 모델의 다른 축인 적극적 재취업교육(active labor market policy)은 고용안정성이 일정 수준 이상 보장되므로 그 필요성 자체가 크지 않게 된다. 덴마크처럼 별도로 이를 확대하지 않아도 고용안정성을 직접 확보해 주게 되므로 넓은 의미에서 고용안정성 및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해고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직업교육은 여전히 필요하나,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제과제빵/IT 기능사 쪽으로는 무상 교육지원이 되고 있으니 지원대상을 더 확장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현행 체제를 유지하는 정도로도 덴마크식 'active'함에 준하는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 본다.

- 이렇게 고용안정성 보장을 하고 현행 직업교육 체제를 유지 혹은 소폭 확대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정규직이 늘지 않는 이상 그 돈을 노동자들에게 부담하라고 하는 건 안 그래도 없는 돈 떼어가는 셈이니 병 주고 약 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그 재원은 안정적으로 마련할 수 있다. 답은 부자증세다. 당장 소득세 더 걷는 건 너무 어렵다고 할지라도 거의 무한정 연장될 기세인 법인세 감면만 원래 취지대로 일몰제로 바꿔서 원상복귀시켜도 상당한 재원 확보가 가능하다. 비상장주식에 대한 시세차익에 대해서도 과세하고, 그것이 나중에 상장될 경우에는 비상장주식 취득가액과 상장가액의 차이를 양도소득에 준하는 것으로 보아 과세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비상장주식으로 돈 불리는 건 어차피 일정 수준 이상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 아니면 꿈꾸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사실상 부자증세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돈보다 더 근본적인 건 이상의 모든 가능성을 실현 가능케 하는 힘, 즉 법적/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것이다. 덴마크에서는 황금삼각형 모델의 실현이 노사정 합의에 의해 가능해졌지만, 코포라티즘에 익숙지 않은 우리나라 환경에서 노사정 합의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아무리 합의를 해 봤자 약속만 있고 그게 법제화되지 않으면 그 합의는 무용지물이다(DJ 때 노사정위원회의 실패를 보라).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는 옳은 방향에 대한 판단이 섰다면 법제화를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주체가 그 방향을 밀어붙이는 방식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물론 이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민주적 공론화가 필요하나, 그 합의를 실제로 실현하는 데에는 강한 제도의 힘이 있어야만 한다.

- 그러려면 입법적 힘뿐만 아니라 사법적 힘도 필요하다. 형식적 법리만 알기보다는 노동법의 취지에 대한 현실지향적 이해와 해석도 할 수 있는 전문법관의 확대는 그 힘을 확보할 수 있게 하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제도의 완성은 그 제도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관련 규정의 적용 방향에 대한 최종해석이기 때문이다(정리해고 요건이나 통상임금 산정기준은 대법원 판결로써 비로소 구체화됐다). 지금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제도 및 관련 규정에 약자와 소수자의 이익을 조금 더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불가능할 경우에도 현행 제도 안에서라도 최대한 위 원칙에 가까운 법해석을 통해 부족하게나마 제도적 뒷받침을 할 수 있다. 입법적 힘의 확보를 통해 제도개선이 가능한 경우에도 그 취지와 적용 방식을 확인하는 법해석이 있을 때 비로소 그 제도는 반대자들의 무력화 시도를 이겨내고 자리잡을 수 있게 되므로 사법적 힘의 확보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다시금 말하건대 입법 및 사회 영역에서의 코포라티즘이라는 막연한 희망에 기대는 것은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입법적 대표성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별개로(이것은 그 자체로 한국정치와 사회운영의 민주성 증진을 위해 중요하며 이를 위한 비례대표제 확대 등의 방안에 대한 논의는 별도로 필요하다), 민주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반영할 수 있게 하는 사법적 힘에 대한 관심도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사실 넓게 보면 사법적 힘까지 고려하는 사회운영방식의 구성은 그간 정치 관련 사안에서는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왔던(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정치적 판단을 어쩔 수 없이 다수 내려 왔던) 사법부에게도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행위자로서의 몫을 현실에 맞게 인정해 주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