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저것생각

어떤 밝음: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환한

Super:H 2012. 6. 24. 00:21

  오늘따라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번 기말고사가 대학을 결정지을 마지막 시험이라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을 느껴 그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정작 공부해야 할 책 내용엔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멘붕’에 빠져 특별한 소식도 없는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하릴없이 스크롤하고 있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엄마였다.


  가벼운 폐렴으로 입원하신 할아버지를 간호하시느라 피곤한 와중에서도 아들 생각이 나서 전화하셨다는 엄마께, 나는 힘내시라는 한 마디를 해 드리기는커녕 오늘따라 공부가 잘 안 된다고 투정만 계속 부렸다. 그런데도 엄마는 당신이 힘들다는 기색은 조금도 하지 않으신 채 밝은 목소리로 나를 격려해 주셨다. “우리 아들, 오늘 힘든 모양이구나.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좀만 더 힘내면 돼. 파이팅, 우리 아들! 사랑한다.”


  그 몇 마디의 힘은 대단했다. 두어 시간 동안이나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내 마음이, 채 1분도 안 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는 금세 진정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내게 부모님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깨달았다. 내가 그 고마움과 소중함을 얼마나 자주 잊고 지내는지를.


  오늘 내가 그랬듯, 모든 아들딸들은 우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부모님께 늘 의지하면서도 그 고마움과 소중함을 툭하면 잊어버린 채 부모님께 짜증만 내기 일쑤다. 그것은 아마 그 아들딸들이, 그러니까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만을 인식할 뿐 자신이 그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부모님의 존재를 미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라는 존재자를 밝혀 주고 그로써 그 존재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부모님이라는 존재를, 우리는 자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존재 망각’ 때문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모든 것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다고 여기며 오만해지곤 한다.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물어보시거나 도와달라고 부탁하실 때, 예를 들어 새로 장만하신 스마트폰 사용법을 알려달라고 하실 때, 우리가 ‘엄마, 아빠는 그것도 몰라?’ 하며 부모님을 얕보려는 마음을 (잠깐이나마) 품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부모님이 우리보다 한참 위의 인생 선배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부모님이 삶에서 얻은 수많은 지혜를 존경하면서도, 나는 아는데 부모님은 모르는 것이 아주 조금 있다는 이유만으로 감히 부모님을 무시하려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존재자가 자신의 특성을 간직하고 있듯이, 모든 개인이 개별적 특징으로 발현될 수 있는 씨앗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씨앗이 꽃이 되어 하나의 완전한 개별적 특성으로 피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우리라는 존재자를 밝혀주고 품어주어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한다. 그래야 각 존재자들은 개별적으로 도래하여 자기 자신으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정리해 보면, 부모님이라는 존재가 우리를 밝히면서 우리에게 건너올 때, 우리라는 존재자 각각은 비로소 스스로를 간직하면서 도래할 수 있다. 부모님은 자녀들이 진정한 개별자로서의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들을 조용히, 하지만 환하게, 밝히는 것이다. 이때 부모님이 자녀를 밝히는 빛을 내는 원동력은 자녀에 대한 필리아―희생적 사랑―이기에, 그 빛은 조명가게에 진열된 여느 전구와 달리 자신을 뽐내지 않지만 세상 어떤 전구보다도 밝고 아름답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다자인(현존재)’으로 규정하면서, 인간은 ‘탈존’하면서 자신의 외부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타자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타자들을 찾고 그들에게 마음을 열 준비를 하기 전에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정말 중요한 타자를 망각한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를 밝히는 그 타자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가장 소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 스스로 조금씩 사그라지면서도 끝까지 우리를 위해 빛을 낼 수 있어서 행복해하는 그 타자 ‘부모님’의 존재를 잊지 않고 늘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삶의 진리고 알레테이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