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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戱曲, Drama)

Super:H 2008. 9. 11. 19:51
[출처] 브리태니커

희곡 (戱曲, Drama)
배우에 의해 무대 위에 표현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대사를 중심으로 씌어지는 예술의 한 형식.


개요
대사를 이용하지 않고 무언극의 형태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사상이나 감정, 욕망 등을 자세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희곡의 본질
희곡은 언어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문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상연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여러 무대 조건의 제약을 받게 된다. 따라서 다른 관점에서 보면 희곡은 상연됨으로써 비로소 본래의 존재를 주장할 수 있는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견을 갖는 사람에게 있어 희곡은 대본이며, 일종의 청사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청사진은 배우가 장치·소도구·조명·음향효과를 갖춘 무대에서 사건을 실제로 연기하고 등장인물을 창조함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이론적으로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예리한 상상력을 갖고 있다면 희곡을 읽는 것만으로도 무대에서 상연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극작가는 단순히 작품이 읽히는 것보다도 관객이 실제의 무대를 봄으로써 자신의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디오 드라마는 귀로 들을 수 있을 뿐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배우는 인물을 창조하고 언어의 충분한 의미를 소리로 표현함으로써 여러 가지 사건을 연기하는 것이다. 라디오 드라마나 텔레비전 드라마에 있어서도 극작가는 작품의 길이나 형식면에서 실제로 상연될 경우 여러 가지 제약을 받는다. 이것이 상연용 희곡, 라디오 드라마, 텔레비전 드라마 등과 레제드라마(Lesedrama : 서재희곡)의 큰 차이점이다.

레제드라마는 그 이름이 나타내듯이 문학적으로 읽히는 것을 목적으로 씌어진 것으로서 상연과는 관계가 없으며, 테니슨의 〈해럴드〉(1876) 등이 그 일례이다. 레제드라마는 보통 본래의 극 구조가 결여되어 있어 상연용 희곡에 비해 굉장히 긴 경우도 있다. 레제드라마는 대화 형식으로 씌어진 이야기와 비슷하여 운문 형식을 취할 수도 있고 작가의 일반화된 철학과 비견되는 것으로 볼 수가 있어 연극이 산문극에 의해 지배된 시대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레제드라마도 희곡인 것은 분명하지만 엄밀하게는 희곡이란 극장이나 관객 앞에서 상연되는 것을 목적으로 씌어진 것에 한정된다. 희곡과 상연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의견이 전개되어왔다. 어떤 사람은 희곡이란 상연됨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며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가 연극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확실히 양자의 상호 교류에 의해 희곡의 가치가 충분히 발휘되는 것이나, 극에 있어서 관객이 불가결한 요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라디오 드라마의 경우, 관객이 연기자의 바로 눈 앞에 있지는 않지만 성우는 전파에 의해 청중의 마음 속에 예술을 완성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학으로서의 희곡
고대로부터 16세기 자연주의 이론이 생겨나기까지 희곡이란 다음의 3가지 양식 중 하나로 씌어진 문학이라고 여겨져왔다. 첫째, 서술양식으로, 시인은 몸소 독자나 관중의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묘사하고 설명하고 주석을 달면서 말을 하는 것이다. 둘째, 연극 그 자체로, 시인은 이야기를 하듯이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인물이나 그 인물의 행동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양식은 극적 표현 양식, 또는 대화나 회화 양식이라고도 한다. 셋째, 이상의 2가지 양식의 혼합양식으로, 시인은 때로는 직접 서술 양식으로 말하기도 하고, 극적 표현 양식을 빌리기도 하며 다른 인물을 통해 말하기도 한다. 이 분류에 의하면 오늘날 서술적이라고 보는 서사시와 같은 시도 밀턴의 소네트 〈실락원 Paradise Lost〉처럼 혼합형 형태를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 3가지 형식에 견주어 연극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대화체로 씌어져 있기만 하면 모두 연극적 형식이며, 비극적(非劇的) 대화라는 것은 언어의 모순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는 철학적 대화와 상연을 목적으로 씌어진 비극(悲劇)과는 명백하게 다르며 이를 연극의 범주에 넣지는 않는다. 단지 철학적 대화는 현대적 의미에서는 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작가의 사상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문학과 희곡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연극은 문학으로서의 일면을 가지며, 따라서 넓은 의미의 희곡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연극이란 인간의 행동을 재현함으로써 확인하는 기술이며, 나아가서 반복하여 재현할 수 있는 형태로 정착시키는 기술인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문학의 소임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즉흥적인 연극일지라도 실제로는 배우의 오랜 수련의 산물이고 그 수련의 과정이며, 행동의 많은 요소가 씌어지지 않은 연극으로서 고정되어 있다. 흔히 즉흥극은 정형적인 줄거리를 갖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개개의 상황이나 연기에 반복 가능한 정형성을 포함하고 있다. 행동이 반복가능한 형태로 재현될 때, 즉 그 본질적인 형태가 유출되어 파악될 때 그것을 언어에 의해 기술하는 것이 이미 절반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허술하게 기술하면 '문학성'이 낮은 소위 상연 대본이 생겨나는 것이고, 정확하게 기술하면 '문학적'인 희곡이 탄생하는 것으로, 어느 경우이건 행동의 문학화는 이미 즉흥극의 신체운동 속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모든 문학은 그 근저를 살펴보면 연극이며, 작자의 내면적인 연기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고대의 서정시나 서사시는 물론 중세의 많은 이야기도 본래 청중 앞에서 낭송하는 것으로, 몸짓을 동반하여 상연되는 것이었다. 묵독을 기본으로 하는 근대 소설은 오히려 문학적으로 예외적인 형태이지만 그래도 그 창작의 과정에 일종의 '연기'의 심리가 숨어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희곡의 구성
희곡을 쓰는 행동은 동시에 내면적으로 연기하는 행동이며, 따라서 그 자체 속에 전망과 몰입의 양면을 포함하여 그 자체의 내부에 미소한 중층구조를 만들어내게 된다. 우선 희곡의 기본적인 소재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예를 들면 '범인을 찾는 것'이라든가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는 것'과 같은 한 구절로 나타낼 수도 있고 또한 수백 행의 문장으로도 설명할 수 있으며 아직 고유의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 즉 그것은 전개의 순서도 세부의 분절도 없이 작자의 기분적인 심상으로 응축되어 있어 흡사 사람이 사물을 생각해낼 때의 최초의 막연한 기억 표상과 비슷하다. 작자가 이야기를 생각해낼 경우 그 최초의 인상은 슬펐다거나 좋았다거나 하는 기분의 흐름이며, 막연한 행동력의 감촉이며, 그 무게나 힘의 반응임에 틀림없다. 바꾸어 말하면 작자가 창작의 출발점에서 만나는 것은 행동의 유동성과 응축의 측면으로 그 속에 몰입한 뒤 작자는 그것을 전개해 분절하려고 시도한다. 거기에서 태어나는 것이 희곡의 '장면'이며 그 연속체로서의 '막'인데, 이것은 서로 단락이 지어져 있고 나란히 늘어서 있어 전체적으로는 공간적인 넓이를 만들어낸다. 장면의 최소 단위는 문자 그대로 무대상의 정지된 공간이며 그 속에서 복수의 인물이 한 폭의 활인화(活人畵)를 그려내고 긴장된 대결의 구도를 펼친다. 예를 들면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거나 서로 사랑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일련의 시간적인 경과를 의미하며, 이것은 두 사람이 동시적으로 만나는 몇 개의 장면으로 분할되고 그때 경과되는 시간의 속도가 늦추어지게 된다. 즉 이야기가 결말을 서두르는 힘인데 대해 장면은 그것을 막아 정지시키는 힘을 갖는 것으로, 이 대립하는 계기의 길항작용(拮抗作用)으로부터 하나의 리듬 구조가 생겨나는 것은 삼단뛰기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다. 한번에 들어마신 호흡은 분할됨에 의해 그 강도를 더하며 전진과 정지의 힘에 의해 행동은 완결되는 것이고, 이 모순의 균형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 소위 희곡의 '줄거리'이다. 희곡을 쓰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의미에서의 줄거리를 만드는 것이며 이야기의 무게와 힘을 정확하게 감지하는 한편 그것에 길항할 수 있는 적절한 장면의 분할과 배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작자가 이야기의 내측과 외측에 동시에 서 있는 것인데 이 양의적(兩義的)인 태도는 등장인물을 그리는 것에서도, 대사를 쓰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인물은 각각 독자적인 사상이나 감정을 포함하는 내면을 갖는 한편, 외측으로부터 한정되는 역할을 맡는 존재인데 그 자체로 중층적 또는 양의적인 구조를 갖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이 인간인 이상 그들은 자립적·주체적인 존재인 동시에 줄거리를 전달하는 도구이기도 하여 주역·조역·악역 또는 근대의 심리적 성격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즉 그들은 스스로 세계를 보는 인간인 동시에 극적 세계 속에서도 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자는 이러한 대립하는 양면을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이것과 관련하여 대사도 내측과 외측의 이중구조를 갖고 있어 인물의 개성적이고 다양한 내면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극적 세계 전체의 통일적인 기분을 이야기하게 된다. 즉 그것은 인물의 언어로서 순간마다 이질적인 발견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이야기의 언어로서 일정한 문체의 일관성을 나타내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통일적인 시적 운율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은 또한 배우의 신체적인 연기가 묘사적인 다양성을 보여줌과 더불어 일정한 양식적인 통일을 지향하고 때로는 무용적인 양식을 갖는 것에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희곡은 당연히 배우의 신체적인 연기에 의해 완성되는데, 이것은 물론 무언가 새로운 태도의 전환도 아니고 희곡 속에 존재하지 않은 것을 덧붙이는 것도 아니다. 현실의 행동이 '하는' 것 속에 '보는' 것을 포함하고 있듯이, 연기는 연기하는 것 속에 읽는 것을 포함하며 희곡의 구조에 대응하여 그 자체 속에 또한 중층구조를 감추고 있다. 근대의 연극에 있어서는 배우의 일로부터 연출이라고 하는 것이 독립하여 그것이 연기의 '읽는' 측면을 분담하고 있는데, 이 는 연기 그 자체의 양의적인 성격 때문이다.